입력 : 2015.08.27 14:30 | 수정 : 2015.09.09 14:20
1945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광복 70년 동안 대한민국이 걸어온 시간들은 그 어떠한 것으로 정리를 하더라도
다 풀어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들과 함께 해온 물건들의 탄생과 소멸을 담은 이야기 '물건의 추억'으로 한 사람의 개인사를 넘어선
광복 후 70년간의 추억을 함께 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TV 예능 프로그램에 흰색 바가지 모자를 쓰고 출연하는 젊은 셰프에게 '골무오빠'라는 애칭이 붙자, 어느 중학생이 물었다.
"골무가 뭐예요?" 인터넷에도 "골무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요?"라는 질문이 여럿 보인다.
바느질할 일이 거의 사라지면서 골무도 대중과 멀어지고 있다. 손가락 끝에 끼워 바늘에 찔리지 않게 보호하는 골무는 옷을 직접 지어 입던 시대엔 여성들 필수품이었다. 선비들에게 붓·먹·종이·벼루라는 '문방사우(文房四友)'가 있듯, 바느질하는 여성들 곁엔 '규중칠우(閨中七友)', 즉 방 안의 일곱 친구가 있었다. 자(尺), 가위, 바늘, 실, 골무, 인두, 다리미다. 이 도구들을 의인화한 조선시대 소설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에선 흥미롭게도 '감투할미(골무)'가 가장 어른스러운 좌장이다. "나는 매양 바늘 귀에 찔려도 낯가죽이 두꺼워 견딜 만하다"고 의젓하게 말한다. 규중칠우가 부인에 대해 험담하다 들켜 단체로 꾸중을 들을 때도 일곱 도구를 대표하여 부인에게 머리 조아리며 "젊은 것들이 망령되이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들 조그만 공을 생각하여 용서하심이 옳을까 하나이다"라며 사과하는 것도 골무다.
바느질용 골무는 대개 여성들이 헝겊으로 직접 만들었다. 한 땀 한 땀 수놓아 골무를 만드는 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전통 복식 연구가 고 석주선씨가 가슴 아픈 일 있을 때마다 참을 인(忍)자를 보이지 않게 새겨넣어 만들었다는 골무는 1300개를 넘겼다. 골무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상처 보호용 고무제 골무는 연한 노란색이고 길이가 손가락만 했다. 모양이 이렇다 보니 남성용 피임기구(콘돔)를 골무로 혼동하는 일도 있었다. 거국적 산아제한 정책이 추진되던 1970년대 어느 며느리가 혼수 속에 챙겨온 피임기구를 처음 본 시어머니는 "무슨 골무가 이렇게 약하냐"며 집어들어 주변을 민망하게 했다(경향신문 1977년 8월 11일자).
골무의 시대가 저무는 듯해도, 유독 변함없이 애용되는 골무가 있다. 서류를 넘기기 쉽도록 엄지에 끼는 사무용 골무다. 이걸 가장 '애용'하는 직업은 판사다. 산더미 같은 기록을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1997년 IMF 사태가 터진 이후 이런저런 소송이 폭주하면서 재판 기록의 양이 급증하자 판사들에게 골무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000년엔 전국 법관들에게 새해 선물로 골무가 전달됐다(조선일보 2000년 1월 6일자). 김황식 전 총리가 법관 시절 늘 몸에 지녔던 필수품도,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판사의 물건 1호'로 꼽은 것도 다름 아닌 골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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