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9일의 도쿄(東京). 서둘러서 업무를 마친 필자는 카메라를 들쳐 맸다. 이유는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묘지(墓地)와 묘비(墓碑)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과거부터 '그의 묘지와 비(碑)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동무는 일본 친구 '도미타 가즈나리(富田一成·61)'씨- 그는 '김옥균이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와 비슷하다'면서 흥미 있어 했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도미타(富田)씨는 한 장의 티켓으로 목적지를 다 돌아볼 수 있도록 머리를 짜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도쿄의 지하철ㅡ. |
나무들의 크기는 곧 역사의 크기던가. 분쿄구(文京區)의 도쿄대(東京大)와 가까운 지하철 혼코마고메(本駒込) 역 계단을 오르자 거목(巨木)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목들의 몸통과 키에서 세월의 무게와 두께가 느껴졌다. 긴 담장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자 사찰들이 나왔다. 지금은 다소 외딴곳이나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는 도심지였던 관계로 유서 깊은 사찰들이 많았다. 10여 분 쯤 걷자 '신죠지(眞淨寺)'라는 사찰이 나왔다.
"바로 이곳입니다. 이 사찰에 김옥균의 묘지가 있을 것입니다."
신죠지(眞淨寺)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도미타(富田)씨가 지도를 펼치면서 필자에게 설명했다. 1613년 창건된 신죠지(眞淨寺)는 1761년 이곳으로 이전돼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필자는 기웃거리며 신죠지(眞淨寺) 안으로 들어갔다. 사찰 경내는 조용했다. 살찐 고양이 한 마리가 길게 하품을 하고 있을 뿐, 스님들도 보이지 않았다. 1000여기의 묘지들도 '나카무라(中村)' '후지하라(藤原)' 등 각각의 명패를 달고서 침묵하고 있었다. 묘지에서도 일본인들의 공명(共鳴)이 들리는 듯했다.
'이토록 많은 묘지들 사이에서 김옥균의 묘지(墓地)를 찾을 수 있을까?'
신죠지(眞淨寺)의 법당 |
김옥균의 묘지를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일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필자는 궁리 끝에 법당 문을 열고 스님을 불렀다. 사찰도 현대화의 물결을 탄 것일까. 이 절에는 교회나 성당처럼 신도들을 위한 의자가 길게 놓여 있었다. 불공을 드리려면 의례히 바닥에 엎드려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모습이 연상되는데, 신죠지(眞淨寺)는 그러한 전통을 파괴(?)하고 있었다.
"스님! 안녕하세요? 저...한국의...김옥균의 묘지를 찾으러 왔습니다만..."
"아! 김옥균 선생의 묘지요? 사찰 뒤편에 있습니다. 건물 뒤로 돌아가 보세요."
젊은 스님은 '어디서 왔느냐?'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를 묻지 않고서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필자는 다시 묘지 사이사이를 지나 절의 뒤편으로 갔다. 작은 묘지 숲에 우뚝 선 묘비에는 한자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朝鮮國 金玉均 靈墓
신죠지 경내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
필자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묘비(墓碑)는 비(雨)에 젖어 있었고, 누군가 놓고 간 작은 술잔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꿈꾸던 풍운아 김옥균. '도미타'씨가 내민 일본어 자료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摘示)하고 있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 떠돌다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上海)에서 민비의 자객 홍종우(1850-1913)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유체는 청국군함 '함정호(咸靖號)'에 의해서 본국조선에 운반돼 능지형(凌遲刑: 몸의 일부를 절단하면서 죽이는 청나라의 형벌)에 처해졌다. 몸통은 바다에 던져졌고, 머리는 경기도 죽산(竹山)에, 손과 발의 일부는 경상도에, 기타 수족은 함경도에 버려졌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가이 군지(甲斐軍治)의 사연은?
<일본의 개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에게 법명(古筠院釋溫香)을 붙이고 당시 신죠지(眞淨寺)의 주지 승(寺田福壽)에게 부탁해서 이 절에 안치했다.> 일본어 자료의 계속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과 각별한 사이였다. 일본의 가와무라 신지(川村眞二·67)는 저서 '1만 엔 지폐 속에 살아 쉼 쉬는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김옥균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김옥균의 묘지와 나란히 있는 '가이 군지'의 묘 |
<1893년 3월 갑신정변의 주역이며 조선독립당을 이끌었던 김옥균이 암살됐다. 김옥균은 후쿠자와가 아끼고 보호했던 지사(志士)였다. 그 해 7월 청일 양국은 조선의 독립문제로 충돌했고, 마침내 태안반도 해역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청일전쟁이었다.>
그런데, 김옥균의 묘(墓)와 나란히 붙어있는 묘지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가이 군지(甲斐軍治)'-그는 김옥균의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숨겨서 일본으로 유입했던 인물이다. 김옥균을 흠모했던 '가이 군지'는 "자신이 죽으면 김옥균과 나란히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있어서는 국경이 무슨 소용이랴. 그는 소원대로 김옥균 묘지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사찰의 경내에서 만난 또 다른 스님에게 필자는 몇 가지를 질문했다.
사찰의 경내에서 만난 또 다른 스님에게 필자는 몇 가지를 질문했다.
"여기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많지는 않으나 가끔씩 오십니다. 도쿄대(東京大)가 가까운 때문인지 학생들이 옵니다.“
필자와 도미타(富田)씨는 '한국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고, 일본 대학생들이 김옥균의 묘를 찾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오야마(靑山)의 외국인 묘지를 찾아서
필자와 도미타(富田)씨는 김옥균의 묘지를 뒤로하고 신죠지(眞淨寺)를 나섰다. 아오야마(靑山)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다. 시간 단축을 위해 도쿄대(東京大)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다. 도쿄대의 빨간 정문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도쿄대 교내에도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거대한 은행나무들이 가득했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서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김옥균의 비(碑)가 있는 아오야마(靑山)의 외국인 묘지였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육교를 건너고, 또 길을 걸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습도가 높은 관계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아오야마(靑山) 공원을 지나 외국인 묘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외국인 묘지는 더없이 넓었다. 묘지가 너무 넓은 탓에 다시 한 번 어려움에 봉착했다. 관리자도 행인들도 없어서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료에 매달려야 했다.
아오야마(靑山)공원 |
'도미타'씨의 도움이 없었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자료를 뒤져서 알아낸 사실은 '4구역과 5구역의 사이에 김옥균의 비(碑)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심마니가 산삼을 찾은 듯 '도미타'씨가 목청을 높이면서 필자를 불렀다.
김옥균의 비(碑)가 세워진 사연은?
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비(碑) |
김옥균의 비(碑)가 세워지기까지의 사연도 특이했다. 이 비(碑)는 일본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1932)'와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의 도움으로 세워졌다. '이누카이(犬養)'는 정치가로써, 일본이 정당정치를 확립하고 보통선거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또 다른 일본인 '도야마(頭山)'는 김옥균을 비롯해서 손문, 장개석 등과 두터운 인맥을 쌓은 사람이다. 특히, 그는 일본에 망명한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가 '우익단체에게 길을 열어줬다'는 점은 우리에게 거슬리는 대목이다.
필자는 김옥균의 비(碑)를 돌면서 전후좌우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잘 보이지 않는 비문(碑文)까지도 촬영했다.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아아, 비상한 재능으로,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만 있었구나...)
(아아, 비상한 재능으로,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만 있었구나...)
이글은 '박영효(1861-1939)가 지었으며 흥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1870-1917)이 썼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유길준(1856-1914)이 새겼다고 한다.
공동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비가 내리는 외국인 묘지. 동행한 일본 친구 '도미타'씨의 모습에서 '빨리 떠나고 싶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옥균의 묘비 건너에 무궁화나무 한 그루가 예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필자는 일본에서 무궁화를 본다는 일이 흔하지 않아서 카메라의 렌즈를 꽃에 맞췄다. 그런데, 그 아래 한국인 묘지 하나가 카메라에 잡혔다. 우연한,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嗚呼 朴裕宏의 墓
무궁화나무 아래에 있는 박유굉의 묘-뒷면에 '타루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필자는 '도미타'씨를 붙들었다. 사전의 정보가 없기에 급한 나머지 스마트 폰(네이버)의 지식을 빌었다.
<박유굉(1867-1888). 1882년 여름 조선 정부에서 임오군란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일본에 박영효(朴泳孝)를 리더로 수신사를 파견할 때 수행원이었다...박유굉은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학업을 계속했다. 1882년 12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고, 188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유학생들이 1884년 갑신정변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자, 조선 정부에서 일본 유학을 금지함은 물론, 재일유학생들에 대한 학자금 중단과 귀국령을 내렸다. 동료 유학생들이 귀국한 뒤 처형당한 소식과 부친의 구금소식 등을 들은 박유굉은 1888년 5월 27일 아침 기숙사에서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언론들이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1900년 4월. 그의 후배들이 비석을 세워 '타루비(墮淚碑)'라는 글을 새겼다.>
그리고, 2006년의 어느 기사가 덤으로 따라 나왔다. "묘지 관리비(1평방미터당 590엔)를 내는 사람이 없어서 강제 철거를 당할 상황에서 한국 대사관이 대납함으로써 철거 위기를 면했다"는 기사였다.
참으로 슬픈 사연들이다. 문제라면 모두가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안타까운 사연들을 뒤로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김옥균의 비(碑) 바로 옆에 묻힌 외국인 '선구자의 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 최초로 온 영국의 Seventh-day Adventist 교회 선교사 '윌리암 그랜저(William C. Grainger, 1844-1899)'의 묘지라고 쓰여 있었다.
김옥균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역 |
'저 많은 외국인 묘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통곡의 눈물들이 함께 묻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외국인들의 묘지에 목례를 하고 묘역을 벗어났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토추(伊藤忠) 상사 빌딩 위 높은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무리지어 몰려왔다. 조각난 김옥균의 흔적(痕迹)을 더듬어본 비 내리는 도쿄(東京)의 9일 오후, 왠지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등록일 : 2015-07-14 08:36 | 수정일 : 2015-07-14 17:54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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