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왕각서(滕王閣序)
왕발(王勃)
원 제목은 《추일등홍부등왕각전별서(秋日登洪府滕王閣錢別序)》혹은 《등왕각시서(滕王閣詩序)》라고도 한다. 등왕각은 그 옛터가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남창시(南昌市)에 있다. 초당사걸(初唐四傑) 중의 한 명인 왕발(王勃)은 명문가 출신으로 재능이 뛰어나 성년이 되기도 전에 관직에 나갔다. 하지만 곧 남들의 시기를 받아 일찍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그로부터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천하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등왕각은 등왕으로 피봉된 당고조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홍주도독(洪州都督)으로 있을 때인 영휘(永徵) 4년(653)에 감강(竷江) 변에 지은 누각이다. 상원(上元) 원년(675) 중양절(9월 9일)에 홍주도독 염공(閻公)이 등왕각에서 주연을 열고 손님들을 청했다. 그때 마침 왕발이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에 남창(南昌)을 지나다가 이 연회에 참석하여 즉석에서 이 서(序)와 시(詩)를 지었다. 전반부는 홍주(洪州) 일대의 번화하고 풍요로우며 인물은 뛰어나고 지세는 신령스러운 형세와 등왕각의 수려하고 웅장한 아름다움 및 연회의 성황을 그렸다. 후반부에서는 타향에서 객으로 지내며 품은 뜻을 펼쳐 볼 수 없음을 탄식한다.
당나라 때에 편찬된 소설집 당척언(唐摭言)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 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 홍주도독 염공은 그의 사위인 맹학사(孟學士)로 하여금 <등왕각서(滕王閣序)>라는 제목의 글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연회석 상에서 염공은 지필을 빈객들을 향해 돌리며 글을 청하는 척하며 맹학사에게 글을 짓도록 사양해주기를 은근히 비쳤다. 빈객들이 염공의 뜻을 눈치 채고 모두 사양하는 데 뜻밖에 왕발이라는 젊은이가 추호도 거리낌 없이 지필을 받았다. 염공이 마음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소매를 떨구며 연회석에서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연회석 상의 일이 궁금했던 염공이 사람을 보내 왕발이 글을 짓는 정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맨 처음 가져온 ‘ 豫章故郡, 洪都新府’라는 문귀를 보고 ‘ 역시 평범한 글쟁들의 상투수법이군!’이라고 평했다. 이어서 두 번째로 가져온 ‘ 星分翼軫, 地接衡廬’라는 문귀를 보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게 신음소리만 냈다. 이윽고 ‘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는 싯귀가 올라오자 악연히 놀라 자리에 일어나며 ‘ 진실로 천재로다. 마땅히 만세에 이름이 날릴 불후의 명작이로다.’라고 경탄했다.
경치와 서정의 묘사를 결합시켜 단숨에 지어낸 이 글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다. 형식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이며, 대구가 뛰어나고 음운도 잘 맞는다. 사조가 화려하고 우아하며, 전고(典故)를 많이 인용하였다. 풍격은 소탈하면서도 원숙하고 힘이 있으며, "지는 노을은 외로운 기러기와 함께 날아가고, 가을 강물은 아득한 하늘과 일색이구나!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등과 같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명구도 있어 오래도록 널리 전해지는 명작이 되었다.
왕발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강주(絳州) 용문(龍門 : 山西省 河津縣) 출생이다.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불리워진다. 수(隋)나라 말의 대유(大儒)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조숙한 천재로 6살에 이미 문장을 지었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했다. 급제하기 전에 이미 그 재능을 인정받아 15세 때인 664년에 이미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패왕(沛王)으로 있던 황족 이현(李賢)의 부름을 받고 그를 섬기던 중 , 당시 유행하였던 투계(鬪鷄)에 대하여 장난으로 쓴 글이 고종(高宗)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중앙에서 쫓겨났다. 사천(四川) 지방을 방랑하던 왕발은 뒤에 사람을 죽인 관노(官奴)를 숨겨주었다는 죄를 범하여 관직을 빼앗겼다. 아버지 왕복치(王福畤)도 그 사건에 연좌되어 교지령(交趾令)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교지의 아버지를 뵙기 위해 바닷길을 이용하여 만나러 가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고 말았다. 등왕각서는 남창을 경유하여 교지로 가던 중 유숙할 때 우연히 연회에 참석하여 지은 시로 그가 죽기 전 1년 전의 일이다.
豫章故郡(예장고군) 옛 예장군이었던 이곳은
洪都新府(홍도신부) 홍주(洪州)의 새로운 치소가 되었다
星分翼軫(성분익진) 별자리로는 익(翼)과 진(軫)에 해당하는 땅으로,
地接衡廬(지접형려) 형산(衡山)과 여산(廬山)에 접해 있다.
襟三江而帶五湖(금삼강이대오호) 삼강(三江)을 옷깃처럼, 오호(五湖)를 허리띠처럼 두르고
控蠻荊而引甌越(공만형이인구월) 형만(荊蠻)을 누르고 구월(甌越)을 끌어당긴다.
物華天寶(물화천보) 이곳 물산의 정화는 하늘이 내린 보배이니
龍光射牛斗之墟(용광사우두지허) 용천검의 광체가 견우성과 북두성 사이를 쏘았고
人傑地靈(인걸지영) 인물은 걸출하고, 땅은 영기가 있어
徐孺下陳蕃之榻(서유하진번지탑) 서유자(徐儒子)는 태수 진번(陳蕃)이 내주는 평상에 앉았다.
雄州霧列(웅주무열) 경치 좋은 주군(州郡)이 안개처럼 즐비하고
俊彩星馳(준채성치) 광채가 나는 준걸들이 밤하늘의 뭇 별처럼 찬란하게 활약하고
臺隍枕夷夏之交(대황침이하지교) 형만과 중화의 사이에 새워진 누대(樓臺)와 해자에
賓主盡東南之美(빈주진동남지미) 동남의 훌륭한 인물들이 주인과 빈객으로 모두 모였다.
都督閻公之雅望(도독염공지아망) 도독 염공(閻公)의 고상한 인망을 갖추어
棨戟遙臨(계극요임) 게극을 앞세우고 멀리서 부임해왔다
宇文新州之懿範(우문신주지의범) 신주(新州)의 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우문(宇文)의 아름다운 행렬은
襜帷暫駐(첨유잠주) 수레를 멈추고 휘장을 걷었다.
十旬休暇(십순휴가) 마침 공휴일이라서
勝友如雲(승우여운) 훌륭한 벗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千里逢迎(천리봉영) 천리 먼 곳의 사람들도 맞아들이니
高朋滿座(고붕만좌) 고명한 친구들이 자리에 가득했다.
騰蛟起鳳(등교기봉) 솟아오르는 교룡 같고 춤을 추는 봉황새 같은
孟學士之詞宗(은맹학사지사종) 문장의 사종(詞宗)은 맹학사이고
紫電淸霜(자전청상) 자전(紫電)과 청상(靑霜)과 같은
보검의 기개를 갖춘 인물들은 王將軍之武庫(왕장군지무고)
왕장군의 무기고의 쌓인 무기처럼 즐비하다.
家君作宰(가군작재) 우리 아버님이 현령이 되시니
路出名區(로출명구) 가시는 길에 유명한 이곳을 지나셨다.
童子何知(동자하지) 어린 제가 무엇을 알아서
躬逢勝餞(궁봉승전) 이 훌륭한 잔치를 만났겠는가?
時維九月(시유구월) 때는 구월
序屬三秋(서속삼추) 계절은 가을이다.
潦水盡而寒潭淸(료수진이한담청) 홍수물은 다 마르고 차가운 연못의 물은 맑다.
煙光凝而暮山紫(연광응이모산자) 안개는 엉기고 저녁노을에 저민 산은 붉다.
儼驂騑於上路(엄참비어상로) 말 네 필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여행길에 올라
訪風景於崇阿(방풍경어숭아) 높은 산으로 풍광을 찾아간다.
臨帝子之長洲(임제자지장주) 제자(帝子)의 땅 장주에 임하니
得仙人之舊館(득선인지구관) 선인의 옛 관저가 있었다.
層巒聳翠(층만용취) 중첩한 산봉우리들은 비취빛을 띠고 솟아올라
上出重霄(상출중소) 높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飛閣流丹(비각류단) 나는 듯한 누각에 단청빛 흐르고
下臨無地(하임무지) 아래를 보니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鶴汀鳧渚(학정부저) 학과 오리가 노니는 물가는
窮嶋嶼之縈廻(궁도서지영회) 섬을 둘러 끝없이 이어져 있고
桂殿蘭宮(계전란궁) 계수나무 궁전과 목란 궁궐이
列岡巒之體勢(열강만지체세) 언덕과 산봉우리가 열지어 있다.
披綉綉闥(피수수달) 채색한 작은 문을 열고
俯雕甍(부조맹) 조각한 용마루 얹은 누각을 굽어보니
山原曠其盈視(산원광기영시) 광할한 산과 들이 시야에 가득차고
川澤盱其駭矚(천택우기해촉) 시내와 못은 하도 커서 보는 이의 눈을 놀라게 한다.
閭閻撲地(여염박지) 마을의 민가들은 촘촘하여 빈틈이 없이 늘어서 있는데
鍾鳴鼎食之家(종명정식지가) 그 중에는 때 마다 종을 울려 모으고
솟을 걸어놓고 식사하는 큰 집도 있다.
舸艦迷津(가함미진) 큰 배와 전함들이 정박지를 찾아 헤매는데
靑雀黃龍之舳(청작황룡지축) 뱃고물에 그린 청작과 황룡이 보인다.
虹銷雨霽(홍소우제) 무지개 사라지고 비도 개니
彩徹雲衢(채철운구) 햇살이 구름 사이에서 드러난다.
落霞與孤騖齊飛(낙하여고무제비) 스러져 가는 저녁놀은 외로운 들오리와 함께 날고
秋水共長天一色(추수공장천일색) 가을 물빛은 푸른 하늘과 길게 이어져 한 빛을 이루었다.
魚舟唱晩(어주창만) 저녁 풍경을 노래하는 어부의 노래소리는
響窮彭蠡之濱(향궁팽려지빈) 팽려의 물가에 울려퍼지고
鴈陣寒(안진경한)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聲斷衡陽之浦(성단형양지포)
우는 소리는 형양의 포구에서 멈춘다.
遙吟俯暢(요음부창)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읊조리다
고개를 떨구어 생각에 잠기니
逸興遄飛(일흥천비)
은사가 되고픈 생각으로 재빨리 하늘을 나른다.
爽籟發而淸風生(상뢰발이청풍생)
상쾌한 피리소리 울리니 시원한 바람 일고
纖歌凝而白雲遏(섬가응이백운알)
고운 노랫소리가 함께 엉기어 흰 구름이 머물다 간다.
睢園綠竹(수원록죽)
수원의 푸른 대나무,
氣凌彭澤之樽(기릉팽택지준)
도연명의 술단지속의 국화주 향기를 능가하고
鄴水朱華(업수주화)
등왕각의 연꽃은 업수강변 동작대의 것보다 붉으며
光照臨川之筆(광조임천지필)
등왕각의 광채는 임천내사 사령운(謝靈運)의
아름다운 문장처럼 빛난다.
四美具(사미구)
오늘 이 자리가 네 가지 아름다움을 다 갖추고
二難幷(이난병)
갖추기 어려운 현주(賢主)와 가빈(嘉賓)
두 가지 것도 함께 있으니
窮睇眄於中天(궁제면어중천)
하늘 중천까지 눈길 다 주고
極娛遊於暇日(극오유어가일)
한가한 날에 마음껏 즐겨 논다
天高地逈(천고지형)
하늘은 높고 땅은 아득하니
覺宇宙之無窮(각우주지무궁)
우주가 무궁광대함을 깨달았다.
興盡悲來(흥진비래)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니
識盈虛之有數(식영허지유수)
차고 비는 것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 알았도다
望長安於日下(망장안어일하)
멀리 태양아래 있는 장안을 바라보며
指吳會於雲間(지오회어운간)
구름 사이에 있는 오군과 회계군을 가리켜본다
地勢極而南溟深(지세극이남명심)
지세가 다하니 남쪽 바다가 깊고
天柱高而北辰遠(천주고이북신원)
하늘기둥은 높고 북극성은 멀기도 하다.
關山難越(관산난월)
관애산천(關隘山川)은 넘기가 어려우니
誰悲失路之人(수비실로지인)
누가 길 잃은 사람을 슬퍼해 주리오!
萍水相逢(평수상봉)
부평초와 물이 만났으니
盡是他鄕之客(진시타향지객)
이들 모두가 타향의 길손이로다!
懷帝閽而不見(회제혼이불견)
제왕의 궁문을 그리워해도 보이지 않으니
奉宣室以何年(봉선실이하년)
어느 해라야 선실에서 봉명할까?
嗚呼(오호)
아아!
時運不齊(시운불제)
시운이 고르지 못하고
命途多舛(명도다천)
운명은 어긋나는 일이 많구나!
馮唐易老(풍당이노)
풍당은 늙기 쉬웠고
李廣難封(이광난봉)
이광은 공적이 있어도 봉해지기 어려웠다
屈賈誼於長沙(굴가의어장사)
가의가 장사에 좌천되어 굴욕을 받아야 했던 것은
非無聖主(비무성주)
성군을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었고 竄梁鴻於海曲(찬양홍어해곡)
양홍이 달아나 바닷가에서 숨어산 것은
豈乏明時(기핍명시)
어찌 밝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겠는가?
所賴君子安貧(소뢰군자안빈)
내가 믿는 바, 군자는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達人知命(달인지명)
달인은 자신의 천명을 안다
老當益壯(로당익장)
늙어질수록 더욱 강해진다면
寧知白首之心(영지백수지심)
어찌 노인과 같은 나약한 마음을 갖겠으며
窮且益堅(궁차익견)
가난할수록 더욱 굳세어진다면
不墮靑雲之志(불타청운지지)
어찌 청운의 뜻을 접겠는가?
酌貪泉而覺爽(작탐천이각상)
탐천의 물을 마셔도 상쾌함을 느끼고
處涸轍以猶懽(처학철이유환)
곤궁함에 처해도 오히려 기쁠 것이다.
北海雖賖(북해수사)
북해가 비록 아득하여도
扶搖可接(부요가접)
회오리바람을 타면 아직 가볼 수 있고
東隅已逝(동우이서)
젊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지만
桑楡非晩(상유비만)
노년기는 아직 아니도다!
孟嘗高潔(맹상고결)
맹상은 성품이 고결하나
空懷報國之心(공회보국지심)
공연히 나라에 보답할 마음만 가졌고
阮籍猖狂(원적창광)
완적은 미친 듯이 행동하였으니
豈效窮途之哭(기효궁도지곡)
어찌 막다른길에서의 통곡을 본받겠는가?
勃(발)
나 왕발은
三尺微命(삼척미명)
삼척의 예대를 둘렀던 미관말직 출신에
一介書生(일개서생)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는지라,
無路請纓(무로청영)
배대끈을 청해 보국할 길을 찾을 수 없으니
等終軍之弱冠(등종군지약관)
약관의 종군이 했던 일을 기다렸다가
有懷投筆(유회투필)
붓을 던져버리고 군대에 들어갈 생각도 해 보았으나
慕宗慤之長風(모종각지장풍)
종각의 장풍을 부러워도 했다
舍簪笏於百齡(사잠홀어백령)
백 살이 될 때까지 벼슬할 생각 버리고
奉晨昏於萬里(봉신혼어만리)
만리 먼 곳에 계신 부모님 안부를 받들리라
非謝家之寶樹(비사가지보수)
나는 사씨 집안의 훌륭한 자제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接孟氏之芳隣(접맹씨지방린)
맹자처럼 좋은 이웃은 두겠습니다.
他日趨庭(타일추정)
훗날 집에 돌아가 뜰을 종종걸음으로 지날 때
叨陪鯉對(도배리대)
공자의 아들 리(鯉)가 배운 것처럼
나도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今晨捧袂(금신봉몌)
오늘 소매를 받쳐 들고
喜托龍門(희탁용문)
용문(龍門)에 기탁하니 기쁘도다
楊意不逢(양의불봉)
양득의(楊得意)를 만나지 못하여
撫凌雲而自惜(무릉운이자석)
능운부를 읊조리며 스스로 애석해 한다.
鍾期旣遇(종기기우)
종자기는 이미 만났으니
奏流水以何慙(주류수이하참)
흐르는 강물을 연주하는 것이 어찌 부끄럽겠는가?
嗚呼(오호)
아아 !
勝地不常(승지불상)
이와 같은 명승지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고
盛筵難再(성연난재)
이 처럼 성대한 잔치는 다시 맞기 어려우니
蘭亭已矣(난정이의)
난정은 이이 버려졌고
梓澤丘墟(재택구허)
재택은 페허가 되었다!
臨別贈言(임별증언)
이별에 임하여 이 글을 지어 올림은
幸承恩於偉餞(행승은어위전)
큰 잔치에 초대받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登高作賦(등고작부)
9월 9일 중양절인 등고의 가절에 부를 지음은
是所望於群公(시소망어군공)
여러 공들에게 바라는 바이니
敢竭鄙誠(감갈비성)
감히 저의 보잘 것 없는 정성을 다하여
恭疎短引(공소단인)
공손히 짧게 지으니
一言均賦(일언균부)
한 마디 부를 고루어
四韻俱成(사운구성)
사운으로 서문과 함께 완성했습니다.
滕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임강저)
등왕각 높은 누각 강가에 있는데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패옥 소리, 방울 소리 노래와 춤도 끝났구나
畵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
화려한 누각 기둥에 아침에 날아오른 것은 남포의 구름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
붉은 발 저녁에 걷히니 서산에 내리는 비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
한가한 구름 못에 비치고 해 아득하다.
物換星移度幾秋(물환성이도기추)
해 바뀌고 별 지니 몇 해가 지났는가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
누각 안 왕자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
난간 밖 긴 강물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미주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 : ?-684)의 왕호다. 당고조 이연(李淵)의 22번 째 아들이며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동생이고 당고종 이치(李治)의 숙부로 정관(貞觀) 13년 (639)에 산동(山東) 등현(滕縣)을 식읍으로 받아 등왕에 피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이연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교만하고 방종하여 누차에 걸쳐 법을 범했다.
이원영이 등현의 봉지에 부임함과 동시에 사치를 일삼고, 음락을 즐기며 멋대로 부세를 징수하여 걷은 재물로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기 때문에 당지의 백성들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할 수 없이 태종 이세민은 이원영을 소주(蘇州)로 옮겨가 살게 했다. 그러나 이원영이 등현에 있을 때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여러 개의 정(亭)과 대(臺)를 지어 놀았음으로 부근 일대에서 이미 악명이 나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열악한 않은 환경에서 지내야만 했다. 또한 그의 봉지 등현(滕縣)은 이미 몰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원영은 소주에서 자사로 있다가 후에 지금의 남창인 홍주도독으로 옮겼다. 이때에도 그는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행을 답습했다. 영휘(永徵) 4년(653) 그는 다시 감강(竷江)의 강변에 터를 잡은 후에, 널리 유명한 공인과 장인을 모아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은 누각을 한 채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이 바로 왕발(王勃)에 의해 묘사된 등왕각이다. 고종 조로(調露) 원년(679), 이원영은 다시 융주(隆州) 자사로 옮겨졌다. 융주는 지금의 사천성 랑중시(閬中市)다.
당시 고조는 황제의 자리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어 융주의 낭중으로 물러나 산중에 거하고 있었으나 이원영은 개의치 않고 궁원에 머물려 장기를 두며 즐겨 놀았다. 다시 가릉강(嘉陵江) 변의 옥태산(玉台山) 허리에 높고 웅장한 행궁을 지었다. 후에 두보가 지나가다 지은 시 중에 등장하는 랑중등왕각(閬中滕王閣)이라는 건물이다. 이원영의 임지를 소주에서 오지인 사천의 랑중으로 옮긴 것은 고종 이치가 그에게 근신하라는 1차 경고였으나 그는 여전히 예전처럼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을 계속하며 이치의 경고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여지기승(輿地紀勝)에 의하면 ‘ 랑중에 당도한 이원영은 일찍이 등현에서 행한 폭정으로 얻은 아역비루(衙役鄙陋)라는 악명에 맞게 큰 토목공사를 일으켜 웅장한 궁궐과 높은 누각을 지은 후에 그 이름을 랑원(閬苑)이라 불렀다. 다시 랑중의 옥태산에서 풍경을 즐기기 위해 등왕정(滕王亭)을 지으면서 랑중 생활 5년 동안 그는 즐거움에 묻혀 장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었다.’고 했다. 또 신당서(新唐書)에는 ‘ 등왕이 좌천되어 랑중으로 임지를 옮겼으나 그는 여전히 국법을 지키지 않고 더욱 방종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녹사참군(錄事參軍) 배위(裵韋)가 보다 못해 이원영에게 간했다가 오히려 매를 맞기도 했다.’고 했다.
한 번은 고종이 대대적으로 황실의 제왕들에게 상을 내려 모두에게 채색비단 5백 필을 하사했으나 단지 등왕에게만은 두 수레에 마로 엮은 새끼줄을 주면서 말하기를 “ 등왕께서는 돈과 비단은 이미 많이 갖고 계시어 별도로 비단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두 수레에 실은 마로 꼰 새끼줄을 드리는 것은 가지고 계시는 돈을 꿰는 데 사용하는데 필요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고종은 사치하고 방종한 이원영에게 완곡하게 경고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이원영이 지나칠 정도로 호사하고 방종한 생활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한 것은 잔혹한 황권 쟁탈전 와중에서 자기의 재능을 숨기는 일종의 도회지계(韜晦之計)의 방편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신은 결코 호사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길 뿐이지 황권에는 절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들게 하여 태종 이세민이나 고종 이치의 경계에서 벗어나나 자기의 몸을 보전하려고 한 것이다.
1)예장군(豫章郡)/ 한나라 때 설치한 군이름으로 당나라 때 들어서 홍주(洪州)로 바꾸었다. 그래서 예장은 군의 옛 이름이고 홍주는 신부(新府)라 한 것이다. 남창(南昌)으로 지명이 바뀐 것은 오대 때부터였다.
2)익진(翼軫):고대 천문학자들은 지상의 행정구역에 대응하는 하늘의 별자리를 만들어 분야(分野)라고 불렀다. 익과 진은 모두 별자리 이름으로 남창은 익과 진의 분야야에 속한다.
3)형려(衡廬)/ 형산(衡山)과 려산을 말한다. 형산은 호남성 형양시 남쪽에 있는 산으로 주(周)나라 이래로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하는 명산이다. 려산(廬山) 강서성 구강시 남 40키로 쯤에 있는 명산으로 북으로는 장강, 동쪽으로는 파양호를 접하고 있다. 해발 1최고봉이 해발 1500여 미터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라 웅장하고, 기묘하고 험난하며 경치가 수려한, 즉 웅기험수로 이름이 나 있으며 현재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있다.
4)삼강(三江)/ 장강이 팽려호(彭蠡湖)를 지나면서 세 갈로 나뉘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
5) 오호(五湖)/ 장강 유역의 큰 호수인 파양호(鄱陽湖), 태호(太湖), 청초호(靑草湖), 단양호(丹陽湖), 동정호(洞庭湖) 등을 말함.
6) 형만(荊蠻)/ 서주왕조와 춘추전국시대 때는 남쪽의 강국 초나라를 비하하여 부르는 명칭으로 본문에서는 초나라 땅이었던 호북과 호남성 일대를 지칭함.
7) 구월(甌越)/ 서한 때 동월왕이 그 도읍을 지금의 절강성 영가현(永嘉縣)에 정한 이후로 동구(東甌)라 칭했다. 절강성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8)용광(龍光)/ 용천검(龍泉劍)의 검광을 말한다.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진혜제(晉惠帝) 때 승상 장화가 북두와 견우성 사이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시 천문에 정통했던 남창인 뇌환(雷煥)이라는 사람을 불러 물었다. 뇌환은 그것은 보검의 정광으로써 그 기운이 위로 뻗쳐 하늘에 닿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 보검은 풍성(豊城)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름이 풍성시인 이곳은 강서성 파양호 남단에 있다. 장화는 뇌환을 풍성령(豐城令)으로 임명하여 보검을 찾도록 했다. 임지에 당도한 뇌환은 옥사의 터를 파기 시작해서 4장여를 도 파내려가 돌로 만든 상자를 얻었는데 그 속에서 뻗어나오는 광채가 눈부셨다. 그 안에서 두 개의 검을 얻었는데 하나는 용천(龍泉)이고, 하나는 태아(太阿)였다. 후에 강을 건너다가 바다에 빠뜨리자 검이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갔다고 했다.
9)서유자(徐儒子)와 진번(陳蕃)의 탑(榻) / 후한서 서치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자가 유자(儒子)인 서치(徐稚)는 집안이 가난했으나 평소에 농사에 힘쓰며 덕행을 많이 쌓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때 진번이라는 사람이 예장(豫章) 태수로 부임해 왔는데 그는 평소에 빈객들을 접대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서치만은 초대해서 접대했다. 그럴 때마다 특별히 만든 평상을 만들어 두었다가 서치가 간 다음에는 침상을 세워서 벽에 달아놓곤 했다. 이 일로 해서 생긴 하탑(下榻)이란 말은 존귀한 빈객을 접대한다는 뜻이 되었다.
10) 염공(閻公)/ 이름은 염백서(閻伯嶼)이고 호광(湖廣) 마성현(麻城縣) 출신으로 당대에 홍주도독을 역임한 것 외는 알려진 것이 없다.
11)게극(戟)/ 도독이 행차할 때 표시하는 의장물로 흑적색 비단으로 겉을 싼 창이다.
12) 신주(新州)/ 당나라 때 영남도(嶺南道)에 속한 지금의 광동성 신흥현(新興縣) 일대를 관할하던 주(州) 이름이다.
13) 십순휴가(十旬休暇):당나라 때 관원들은 매 10일 마다 하루씩 휴가를 얻어 쉬는 규정이 있었다.
14)맹학사(孟學士)/ 이름은 불상이나 당척언(唐摭言)에 홍주도독 염백서의 사위라고 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학사는 당나라 때 홍문관(弘文館)과 숭문관(崇文館)의 관리 명칭으로 서적과 저술에 대한 일을 관장했다.
15)자전(紫電)은 오나라 손권이 가지고 있던 6개 중의 2번 째 보검의 이름이고 청상(靑霜)은 칼날의 예리함이 마치 푸른 기운을 띤 서릿발 같다고 해서 붙인 명검의 이름이다.
16)왕장군(王将军)/ 연회에 참석한 빈객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은 불상이다. 남조의 양(梁)나라 장군으로 지략이 겸비한 왕승변(王僧辯)이란 무장을 비유해서 맹학사의 문명(文名)과 호응시킨 것이다.
17)삼추(三秋)/ 가을에 해당하는 7,8,9 월을 각각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등으로 구분하여 합해 삼추라 한다.
18)제자(帝子)/ 황족(皇族)의 뜻으로 등왕 이원영(李元嬰)을 말한다.
19)장주(長洲)/ 등왕각이 세워진 감강(竷江)의 가운데 있는 섬이다.
20)선인(仙人)은 등왕을 말하고 구관은 등왕각을 의미한다.
21)종명정식(鍾鳴鼎食)/ 부리는 사람들이 많아 종을 쳐서 식사 때를 알리고 큰 솥을 걸어서 밥을 짓는 대가를 말함.
22)수원(睢園)/ 서한의 양효왕(梁孝王)이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商丘市) 남쪽의 수수(睢水) 강변의 수양(睢陽)에 지은 토원(菟園)을 말한다. 푸른 대나무가 많은 원으로 양효왕이 당대의 문사들을 초빙하여 연회를 열고 시부를 짓도록 했다. 매승(枚乘)의 <양왕토원부(梁王菟園賦)가 유명하다. 동원(東園), 양원(梁苑) 등으로도 불린다.
23)평택지준(彭澤之樽)/ 팽택은 도연명이 현령으로 근무했던 곳이고 준은 도연명이 국화꽃을 따서 직접 담은 국화주를 담은 술단지다.
24)업수(鄴水)/ 원래 삼국시대 하북의 패자 원소가 업수 강변에 도읍을 세우고 업도(鄴都)라 했다. 후에 조조가 점령한 후에 동작대(銅雀臺)를 세우고 연회를 열자 아들 조식(曺植)이 동작부(銅雀賦)라는 글을 지어 그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25)사령운(謝靈運)/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시인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의 주제로 했다. 당시 시단에서 그가 지은 문장의 아름다움은 안연지(顔延之)와 더불어 제일이었다. 동진 때 관직이 상국종사중랑(相國從事中郞)까지 올라갔다. 남조의 송(宋)에 들어서도 후작(侯爵)의 작위를 유지하고 관직은 영가태수(永嘉太守)·시중(侍中)·임천내사(臨川內史)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26)사미(四美)/ 음악, 음식, 문장, 언어 등의 네 가지 아름다운 일을 말한다.
27)선실(宣室)/ 한문제 때 가의가 대신들의 참소를 받아 장사로 좌천됬다가 후에 그의 재주를 아까워 한 문제가 다시 그를 불러 미앙궁(未央宮)의 선실을 내주고 귀신의 일에 대해 물었다.
28)풍당(馮唐)/ 한문제 때의 관리로 지금이 섬서성 함양시 동북의 안령현(縣) 출신이다. 한문제의 경호원 조장 직책의 중랑서장(中郞署長)이라는 소직을 지냈다. 여러 번에 걸쳐 문제 앞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아 중용되지 않았다. 어느 날 운중(雲中)을 지키던 태수 위상(魏尙)이 큰 공을 세웠음에도 사소한 잘못으로 면직되어 감옥에 갇히자 문제에게 말했다. “ 상은 매우 가볍과 벌은 매우 무겁습니다.”라고 말하여 한문제의 잘못을 지적했다. 한문제가 깨닫고 특명을 내려 위상을 석방하고 원래의 관직으로 복귀시켰다. 이와 함께 풍당은 거기도위(車騎都尉)에 임명했다.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초나라 상국에 임명했다. 다시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가 즉위하여 천하에 현사들을 불러 중용하려고 했으나 그의 나이는 이미 90이 넘어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그의 아들 풍수가 대신 랑(郞)이 되었다.
29)이광(李廣)/ 서한 경제, 무제 때의 명장으로 팽셩 흉노와 70여 차례에 걸쳐 전투를 치러 큰 공을 세웠으나 끝내 열후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마지막에는 대장군 위청과의 불화로 자살했다.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났다. 후에 흉노에게 항복하여 사마천으로 하여금 ‘이릉의 화’를 당하게 한 이릉(李陵)은 그의 손자다.
30)양홍(梁鴻)/ 동한의 부풍(扶風) 평릉(平陵) 출신으로 자는 백란(伯鸞)이다. 함곡관 밖의 패릉산(霸陵山)에 은거하여 밭일과 옷을 짜서 생활하다가 한 번은 은거지에 나와 居,以耕织为业장안을 지나가다 오희가(五噫歌)라는 시를 지어 백성들은 어려운 생활에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사치만을 일삼는 조정을 풍자했다. 한장제(漢章帝)가 그 시를 읽고 매우 노하여 사람을 시켜 양홍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양홍은 변성명을 하고 그의 아내 맹광과 함께 제노(齊魯) 지간으로 몸을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후에 오(吳) 땅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해곡(海曲)은 바닷가의 땅을 의미한다. 형처(荊妻)나 거안제미(擧案齊眉)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 되는 맹광은 양홍의 아내다.
31)노당익장(老當益壯)/ 후한서 마원전(馬援傳)에 ‘ 장부는 모름지기 궁할 수록 뜻을 굳게 가져야 하고, 늙을 수록 강건한 신체를 유지해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나오는 말이다.
32)청운지지(靑雲之志)/ ➀ 입신출세하여 공명을 떨치는 것 ➁ 높은 학문과 덕을 쌓아 고명해 지는 것 ➂ 산림에 들어가 풍월을 벗하며 은일(隱逸)의 생활을 즐기는 것 등의 세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➀의 뜻이다.
33)탐천(貪泉)/ 진서(晉書) 오은지전(吴隐之傳)에 ‘ 오은지가 광주자사(廣州刺史)가 임지에 가던 중 10리 못 미쳐 지명이 석문(石門)이라는 곳에 당도했는데 그곳에 탐천이라는 샘물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샘물을 마시게 되면 염치가 사라지고 마음이 탐욕스럽게 변한다고 했다. 은지가 샘물을 떠서 마시고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 옛 사람이 이 샘물에 대해 말하기를, 한 번 마시면 천금을 가지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백이숙제를 불러 마시게 해보라! 결코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없음이라! (古人云此水,一飲懷千金。試使夷齊飲,终當不易心’). 자사에 부임한 오은지는 더욱 청빈하고 절조있는 생활을 더욱 엄하게 했다.
34)학철(涸轍)/ 장자 외물편 학철지부(涸轍之鮒)를 말한다. 곤궁한 사람에게 먼 훗날 도와주겠다는 한가한 약속을 하는 사람을 풍자한 우화다.
35)맹상(孟嘗)/ 자가 백주(伯周)로 회계(會稽) 상우(上虞)인이며 후한 때 둔리(循吏)이다. 현령과 군수의 직을 청렴하게 행하여 치적을 쌓아 명성이 있었다. 후에 관직에 물러나 은거했다. 환제(桓帝) 때 양교(楊喬)가 그의 품행을 ‘ 청렴한 행위는 속세를 벗어났고, 재능은 ant 사람 중에 뛰어나다.’라고 평하며 천거했으나 임용되지 못했다.
36)완적(阮籍)/ 서진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명이다. 위진교체기의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강한 개성과 자아(自我) 및 반예교적(反禮敎的) 사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술과 기행(奇行)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살았다. 많은 기행 중 ‘청안백안(靑眼白眼)’의 고사는 유명하다. 조위(曹魏)로부터 정권을 빼앗으려는 사마씨(司馬氏)의 막료를 지냈으나, 권력과의 밀착을 싫어했고, 곤란한 처세와 고독한 사상을 시문에 의탁하였다.
37)궁도지곡(窮途之哭)/ 완적은 항상 미친 행동에 아무 것도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했다. 그는 항상 혼자서 수레를 몰고 성문 밖으로 나가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 길을 가다가 마침내 길이 끊겨 수레가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면 땅에 내려 대성통곡을 한 후에 돌아오곤 했다.(진서 완적전)
38)삼척미명(三尺微命)/ 문관의 예복의 허리에 두르는 허리띠를 신(神)이라 하며 그 띠가 미관말직이 두르는 길이가 세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명이라는 주대의 임관제도로써 1명부터 9명까지 있으며 미명(微命)은 일명으로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39)청영(請纓)/ 종군(終軍)은 한무제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사람으로 자는 자운(子雲)이고 제남(濟南) 인이다. 당시 한나라가 남월(南越)과 화친을 행하기 위해 종군을 사자로 삼아 남월왕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