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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 영친왕(英親王) | |
사시[1] | 의민황태자 (懿愍皇太子)/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 (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 | |
휘 | 은(垠) | |
출생 | 대한제국 한성 덕수궁 | |
사망장소 | 대한민국 서울 창덕궁 낙선재 | |
장례식 | 1970년 5월 9일 | |
배우자 | 이방자 | |
아버지 | 이희(李熙) | |
생몰기간 | 음력 | |
양력 |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72세) | |
재위기간 (식민지 조선의 이왕) |
음력 | |
양력 | 1926년 4월 24일 ~ 1947년 10월 18일 (21년 183일) |
대한제국의 황족.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순종과 의친왕의 이복동생. 순종 사후 대한제국의 다음 황제로 즉위할 뻔한 인물. 마지막 황태자. 시호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2]. 가톨릭 세례명은 요셉.
3.1 태자 책봉과 결혼 ¶
이 덕분인지 문제가 있었던 이복형인
의친왕을 제치고 1907년 황태자에 택봉된다[4]. 당시 순종이 즉위한 상태였으니 황태자가아니라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더 정확했지만, 굳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위에선 물러났어도 실질적인 황제는 고종 자신이라는 의지의 표시 이기도 했다.(태종의 예도 비슷한 경우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였는데 역시 자기에게 왕위를 주는 존재는 형인 정종이 아니라 아버지 태조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정종은 한동안 묘호를 받지 못하다 숙종대에 받았다) 당시 유학자들은 황태제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고종은 조선에서도
태종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할 때에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 자격으로 받았다는 전례(...)를 인용하며 황태자로 하길 고집했다.
순종이 독차사건 등의 후유증 등으로 인해 사실상 자신의 핏줄로 후사를 잇지 못하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순종보다는 고종의 영향력이 더 컸다.
그해
일본인들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5] 강제로 일본 여성 이방자와 결혼했다.[6]보통 정략결혼인 경우 당사자들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7]
아이였던 영친왕을 자기 친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했다는 주장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
하지만 나중에 군 장성이 되는... 일단 일본 황족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생활은 유복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 왕족들은
매월 궁내성에서 주는 일정한 생활비 외에는 돈줄이 없었지만 영친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족들을 관리하던 기관이었던
이왕직에서 돈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다.
덕분에 영친왕을 부러워 하는 일본 황족도 있었다고(...). 그러나 태평양전쟁 이후엔 그런거 없다(...).
4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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