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 안중근의사 서거 104주년이 되는날!

yellowday 2014. 3. 26. 08:50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운동가이며 의병장, 정치사상가이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토마스이다. 본관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1][2] 우덕순, 조도선 등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 만주의 각 역 근처에서 이토 히로부미 전 한국통감 등의 하차 시 저격을 준비하였으며,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인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라고 밝혔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구한 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평화론자이기도 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7]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하였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15]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18]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만주 철도의 이사를 맞혔다.[17]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한국 만세라는 뜻이었다.[17]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