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율곡 이이 (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yellowday 2014. 3. 23. 12:47

 

 

이이 (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

(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 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9세에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34세에 임금에게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해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40세 때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편찬했다. 42세에는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 擊蒙要訣≫를,

45세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했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을 쓰고,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이 서용(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 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