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07 14:08 | 수정 : 2014.03.07 14:13
“저격 장면 촬영 동영상 재판 활용”…1910년 NYT 특집 보도
뉴욕 타임스는 1910년 8월14일자에 깜짝 놀랄 특집기사를 실었다. ‘스릴 넘치는 순간을 포착한 희귀한 사진들(Unusal Snapshots Taken at Thrilling Moments)’의 제목으로 한 면 전체를 채운 것이었다.
프랑스 잠수함 조난, 러시아 광산 폭발 등 20세기 초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포착한 것으로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순간 등 8대 사건이 사진과 함께 게재됐다. 그중에서도 신문의 정중앙에 위치해 ‘세기의 사건’으로 대접받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 순간은 유일하게 삽화로 소개됐다. 그런데 이 삽화엔 특이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이토를 사살하는 안중근 의사의 복장이 일본 기모노 차림이었고 이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사 내용을 보지 않는다면 영화 촬영장을 묘사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뉴욕 타임스는 삽화 설명문에 ‘이토 백작을 저격하는 장면은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고 재판에서 상영된 후 일본 정부가 압수했다’고 표기했다.
이에 앞서 뉴욕 타임스와 샌프란시스코 콜, 로스앤젤레스헤럴드 등 미국의 주요 미디어들은 1909년 12월9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발 기사로 일제히 동영상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는 “오늘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입항한 일본의 증기여객선 가가마루호가 가져온 소식에 따르면 하얼빈에서 이토 백작이 피격될 때 러시아 촬영기사가 저격 순간을 촬영했다”면서 “이 동영상은 한국인 저격자의 재판 때 활용된다”고 보도했다.
타임스는 “일본 관리들은 비극의 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500피트(약 10분 분량)의 동영상 필름을 입수, 재판 때 활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또다른 필름 한 세트도 일본에서 공개될 예정”이라고 덧붙여 촬영된 필름이 두 세트임을 시사했다.
이 동영상은 이듬해 2월 일본에서 일반에 공개 상영됐고 이후 미국에서도 상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12월25일 미니애폴리스의 ‘더 벨맨’ 지는 “사망한 이토 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백작이 한국 통감으로 임명됐다”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로 권력을 번갈아 행사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촬영기사가 촬영한 이토의 피격 장면이 내년 재판 때 활용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 “동영상 저격 등 모든 장면 촬영”
뉴욕 타임스는 1910년 8월14일 특집 기사에서 “이토가 코콥포프를 만날 때 이례적으로 동영상 촬영이 된 것은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메라 필름은 빠르게 돌아가며 열차에서 내린 이토 일행이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향해가는 장면을 담았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계속 돌아갔고 모든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장면들이 이어졌다.”
뉴욕 타임스는 이어 “이토 백작의 피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실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부서졌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러시아 촬영기사가 이토 도착 직전부터 저격 순간, 안중근 의사 등이 체포되고 현장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호송되기까지의 전 장면이 촬영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날 게재된 애니메이션은 동영상을 확인하고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저격 상황의 그림은 이토의 관복과 수행원의 위치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성 두 명이 환영의 인사를 하는듯한 포즈도 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안중근 의사의 일본옷 차림이다. 이는 현장의 삼엄한 경비를 고려해 일본인으로 위장했을 개연성을 말해준다. 뉴욕 타임스가 저격 직후 송고한 기사에 따르면 플랫폼엔 이토를 환영하려는 일본인들이 운집했다고 돼 있다. 만일 안중근 의사가 현재 남아 있는 자료사진처럼 허름한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러시아 경찰이 수상쩍게 봤을 가능성이 크다.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를 처음 발굴한 재미 언론인 문기성씨는 “뉴욕 타임스가 동영상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삽화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없다. 당시 장면들은 사진 촬영된 것도 없고 우연히 찍힌 이 동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일본인 위장이 사실이라면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안중근 의사 저격 동영상 1910년 미국서도 상영
역사에 남을 세기의 동영상은 그러나 이후 종적을 감췄고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로부터 85년이 지난 1995년 일본 NHK 방송이 방영한 다큐물에서 안중근 저격 동영상의 일부가 방영됐다.
이토가 타고온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과 이토 일행이 환영객의 영접 속에 플랫폼에서 걸어오는 장면, 안중근 의사 등이 포박돼 호송되는 흐릿한 장면 등 30초 분량이었다. 그러나 저격 순간이 촬영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KBS 역사스페셜팀은 동영상 원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NHK 다큐물이 1941년 아사히신문이 제작한 ‘약진의 흔적’이라는 영화 필름을 활용한 것임을 알게 됐다.
동영상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저격 일주일만인 1909년 11월3일 경성신문의 보도였고 일본 정부가 동영상을 현재 가치로 2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 1만5000원을 주고 구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이듬해 2월1일부터 6일까지 도쿄 국기관에서 공개 상영되는 일도 있었다.
저격 동영상이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미국에서도 상영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지만 이 동영상이 사본인지, 원본을 임대한 후 다시 돌려줬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만일 사본이라면 미국에서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로선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가 안중근 의사가 감행한 ‘세기의 저격’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현존하는 최고의 자료인 셈이다.
다음은 1910년 8월14일 뉴욕 타임스 특집 기사 중 이토 처단 부분.
'지난해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진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한국 통감인 이토 백작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로 돼 있었다.
이토 일행을 일본 환영객들이 플랫폼까지 나와 맞이 하기 위해 공식적인 경호의 벽이 완화된 상태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례적으로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다.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내 촬영토록 한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카메라 필름은 이토 일행이 열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건너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곟속 돌아갔고 모든 상세한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모습이 이어졌다.
현장을 촬영한 필름이 현상됐을 때 내용은 물론, 반응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유럽의 관료 집단은 이것이 공개되면 비슷한 폭력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한 태도는 최근 미국 회사가 코네티컷의 폭발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을 유럽의 딜러들에 판매하려고 했을 때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한 남성은 그것을 러시아로 가져가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폭력이나 범죄의 장면을 보여주는 동영상에 대한 편견은 국가검열위원회(National Board of Censors)의 영향에 따라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토 백작의 저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실제 상황”이다.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파괴됐다. 동영상은 소방차용말들이 멀리서 다가오고 그중 하나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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