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두 권으로 읽는 '모던 경성']
친일·반일의 투쟁으로 암울한 시대… 한국인 정체성에 대한 실마리 제공
性의 상품화 시작한 당시의 광고… 소비자라는 개념 탄생하게 만들어
상품의 시대|권창규 지음|민음사|468쪽|2만3000원
1927년 10월 26일. 종로 단성사에서는 심훈의 감독 데뷔작 '먼동이 틀 때'가 개봉했고, 장곡천정(현재 소공동) 공회당에서는 무용가 최승희의 데뷔 공연이 열렸다. 성황리에 공연을 끝낸 최승희는 그날 이후 성공을 거듭하며 세계적인 무용가로 성장했지만, 대부분의 예술영화가 그러하듯 흥행에 참패한 심훈은 데뷔작을 마지막으로 영화제작의 꿈을 접고 문필가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80여 년 전 어느 날일 뿐인 그날이 적어도 심훈과 최승희에게는 인생의 변곡점과도 같은 잊을 수 없는 날이었을 것이다.
'경성 모던타임스'는 이처럼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기억할 것도, 기억할 필요도 없는 '1920년대 서울'을 살아갔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사건들을 '한림'이라는 가상 인물의 시선에서 재구성한 독특한 형식의 근대 역사서이다. 신문기자 한림은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 현장을 누비며 1920년대 암울한 서울의 정치적 상황과 그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개인들의 몸부림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을사늑약, 고종의 승하와 인산, 3·1운동, 강우규의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 사건,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 임시정부 설립 등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건 자체는 여타의 근대사 서적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다. 을사늑약 당시 참정대신이었던 한규설과 인터뷰 형식으로 을사늑약 전후의 상황을 기술하고, 임종 당일 고종은 무엇을 했으며, 그의 아들 순종과 영친왕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덧붙여 기술하는 식이다.
신문기자 '한림'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영화, 라디오, 레코드, 카페, 자전거, 자동차 등 그 시대 서울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뒤바꾼 새로운 근대 문화와 풍속에도 주목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근대 문화와 풍속 역시 2000년대 이후 활발하게 간행된 근대 문화 연구서의 내용과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때 역시 한림의 시선은 문화와 풍속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을 향한다. 1920년대 최고의 히트곡이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이정숙의 '낙화유수'였다는 사실 그 자체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들 가수가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기술하는 식이다.
'경성 모던타임스'는 "외국처럼 낯설고 타인처럼 어색한" 과거를 살아간 다양한 군상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현대 독자들에게 근대는 무엇인지, 한국인은 누구인지,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는 어떠한 상황을 맞이했고,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해명할 수 있는 훌륭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왼쪽)1925년 신문 광고에 등장한 책‘나체미인 사진집’. 풍만하고 염려(艶麗·아리땁고 고운)한 육체미를 실컷 감상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오른쪽)조선일보 1934년 8월 28일자에 실린 어린이 영양제 광고.‘잘 살찝니다’란 제목이 붙어 있다. /민음사 제공·조선일보DB
1920년대 일간지에 실린 동경 정문사에서 간행한 '나체미인 사진집'은 사랑과 생식의 수단으로서의 성이 '소비를 위한 소비'로서의 성으로 변모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상품의 시대'는 근대 이후 광고가 출세, 교양, 건강, 섹스, 애국이라는 욕망과 관념을 어떠한 방식으로 상품화하여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섬세하게 드러낸다. "우리의 자본으로 만든, 우리의 기술로 만든, 우리의 노동으로 만든 빨랫비누 부표!"와 같은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광고 전략이 한편에서는 민족의식을 견고하게 하는 순기능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까지도 상품화하고 자본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역기능도 있었음을 읽어내는 식이다.
한국인에게 근대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근대는 친일과 반일의 투쟁이라는 단일한 정치적 맥락으로만 이해되어왔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김진송, 현실문화연구),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현실문화연구) 등 그 시대 새롭게 등장한 책은 근대가 문화적 맥락으로도 이해될 수 있음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혁신적이었다. 그 후 10여년 동안 근대 문화는 다양한 자료와 관점에서 설명되어왔다. 이제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기원으로서 특정한 근대 문화와 풍속이 존재했음을 밝히는 것은 더 이상 신선한 시도가 아니다. 근대에 관한 연구는 현대인들이 근대를 공부하고 이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경성 모던타임스'와 '상품의 시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 듯하다. "근대는 외국처럼 낯설지만 오늘처럼 낯익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