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집집이 지붕 위엔 사연이 소복

yellowday 2014. 3. 21. 08:52

안상철 '잔설'

그땐 그랬다. 하늘로 치솟은 고층 건물도, 거리를 쌩쌩 달리는 차도 적었던 시절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거리의 소음도 잦아들면 사람들은 집안에 모여 겨울을 나는 이야기들로 온정을 나누었다. 이 그림 속, 크고 작은 구멍이나 둥글거나 네모난 굴뚝은 집집이 사연을 전하는 듯 정겹기 그지없다. 옹기종기 맞붙어 있는 기와지붕 사이로 소복이 내려앉은 하얀 눈의 모습은 1950~1960년대에 유년기나 청년기를 지내 온 사람들에겐 익숙한 풍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안상철의 1958년작 ‘잔설’ 작품 사진
안상철의 1958년작 ‘잔설’, 210×153㎝, 종이에 수묵. /개인 소장

연정(然靜) 안상철(安相喆·1927~1993)의 '잔설'은 지금은 과거의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당시에는 기존의 전통 화법을 과감히 뛰어넘는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화가 역시 전통 화단에 새 바람을 일으킨 기린아로 주목받았음은 물론이다. 화선지, 먹, 붓을 사용해 수묵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가 하늘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부감 시점을 활용한 파격적인 구도와 현대적인 원근법, 분명 구상적인 풍경을 다루고 있음에도 수평과 수직, 점과 선을 이용해 추상적인 리듬감까지 느끼게 하는 이 그림에 평단과 관중은 모두 찬사를 보냈다. '잔설'은 1958년 국전에서 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국전에서 대통령상까지 거머쥔 안상철은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즘에 기반을 둔 작풍을 버렸다. 1960년대부터는 수묵화에 돌과 같은 오브제를 도입하거나 심지어 고목에 모터를 달아 움직임을 주는 키네틱아트 등도 시도했다. 그는 스스로의 혁신을 꿈꾸고 실천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