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종이에 실린…' 展]
이중섭·박수근 등 근현대 작가, 종이에 그린 작품 132점 선보여
"전쟁통에 변변한 화구(�具)가 어디 있었겠어. 미군이 버린 '레이숑 박스'(비상식량 박스) 주워다가 그 위에 그렸지. 방공호 모래 가마니에 썼던 아사 천, 군용 텐트 기워서 캔버스 삼기도 했고. 당시 최고로 쳤던 일제 '분보도(文房堂)' '후나오카' 캔버스는 언감생심이었어. 그 시절 우린 그렇게 절박했다우."원로화가 박서보(83) 화백은 6·25 전후 우리 화가들은 '또 다른 전쟁'을 치렀다고 했다. "화가들 아지트였던 명동 서울화방에 가면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선생과 자주 마주쳤지. 다들 재료 걱정 마를 날이 없었어." 유화(油畵)의 기본인 캔버스가 화방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비싸고 귀한 재료였다.
- 이중섭의 1954년 작 ‘소와 새와 게’. 캔버스를 살 여유가 없었던 이중섭이 연필로 종이 위에 그린 그림. 연필선 하나로 날렵한 생동감을 줬다. /갤러리현대 제공
"우리 근현대미술에서 종이가 차지했던 지점을 보여준다"는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는 이중섭이다. 가난이 치석처럼 붙어 있었던 이중섭의 삶은, 그에게 단 한 점의 캔버스 작품도 허하지 않았다. '황소' '길 떠나는 가족' 등 대표작도 캔버스가 아닌 종이에 그린 유화다. 하얀 종이도 여의치 않을 땐 담뱃갑 은박지에라도 그렸다. '소와 새와 게'는 날렵한 연필선 하나만으로 화폭 전체를 뒤흔드는 생동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뾰족한 연필 끝에서 작가의 내공은 더 또렷이 발산됐다.
미국의 컬렉터였던 마거릿 밀러 여사에게 그림 값 50달러 대신 물감을 사달라고 했을 만큼 재료에 목말랐던 박수근도 종이 앞에선 자유로워졌다. 그에게 종이는 완벽한 유화를 그리기 위한 초석이었다. 연필로 스케치한 작품 '나무와 두 여인' '모자(젖 먹이는 아내)'는 똑같은 구도의 유화가 있다. 박수근 그림의 생명과도 같은 화강암 느낌의 질감을 걷어내도, 그 자리엔 박수근이 있다. 연필이 일궈낸 탄탄한 조형미의 선묘(線描)가 버티고 있다.
장욱진은 캔버스보다 종이 작업이 더 많은 작가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그의 그림에선 여백이 많다. 종이가 그림을 받치는 화판으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여백으로서 스스로 이야기를 한다.
전시 기획에 참여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예술가는 손이 마려워 가만히 있질 못한다"는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 부인의 말을 빌리며 "예술혼을 자유롭게 불태울 수 있던 게 종이와 연필밖에 없었던 시절, 우리 작가들의 절박한 예술을 들여다볼 기회"라고 했다. 기교에 매몰돼 기본을 망각한 미술학도들도 볼 만한 전시다.
전시장을 찾으면 많은 명작을 한 번에 마주해 행복한 급체에 걸릴지도 모른다. 이 중 유 교수가 꼭 보길 권한 추천작은 이중섭의 '소와 새와 게' '세 사람', 박수근의 '모자(젖 먹이는 아내)', 김종영 '자화상', 김환기 '새와 달', 오윤의 '탈춤'이다. 3월 9일까지. 전시 문의 (02)2287-3500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