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24 09:31
태평무 기원의 세 가지 배경
한성준은 노년인 1938년에 설립한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40여 가지의 춤을 새롭게 만들었다.
한성준이 만든 여러 작품 가운데 승무나 살풀이춤 등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기록이 있으나 태평무는 1930년대
후반에 공연한 기록만 있어 다른 춤들보다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평무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경기도당굿의 무당들이 추던 춤을 변화시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풍년이 들었을 때 축복하는 뜻에서 관가나 궁중에서 추던 궁중무용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조선시대
예인집단조직인 재인청에서 추었던 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평무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한성준은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
‘묵은 조선의 새 향기-가무歌舞편’(1938년 1월 7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당의 춤에 왕꺼리나 대감놀이니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왕꺼리라는 것은 왕을 위하여 추는 춤이라고 하지만,
옛날 임금이 추시었다고 해서 생긴 옛날 춤입니다. 물론 오늘의 무당춤같이 그렇게 뛰면서야 추시겠습니까?
아마 좋은 음율에 취하시어 팔이라도 가만히 쳐드신 거겠지요. 이 춤이 오늘에 와서 변하고 변해서 소위 무당이
전해 내려오는 왕꺼리가 된 것입니다. 나는 이를 태평춤이라고 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성준의 손녀딸인 한영숙은 태평무가 “할아버지 한성준이 만든 춤”이라고 하고, 조선의 마지막 무동(舞童)이었던 김천흥이
“왕꺼리에서 나온 춤을 한성준이 재구성한 춤”이라고 증언한 것을 보면, 한성준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한 것처럼 무당의 춤이
바탕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태평무가 경기도당굿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춤반주음악에서도 드러난다. 태평무 장단은 모두
경기도당굿에서 사용되는 장단으로 구성되었고, 반주악기도 경기도당굿에서 사용되는 삼현육각의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경기도당굿의 무당춤은 서울굿과 함께 전국의 무당춤 가운데 가장 품위 있는 춤사위를 가졌다. 특히 터벌림춤은 신을 모시기 전에
굿을 하는 장소를 정갈하게 만드는 춤인데, 한성준도 터벌림춤의 발동작을 가져와서 태평무의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발디딤새를 만들었다.
태평무 전승의 두 기류, 강선영류와 한영숙류
태평무는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면서 예능보유자는 강선영이 인정되었다. 혼자 추는 독무로 지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한성준이 처음 공연할 당시 태평무는 왕과 왕비가 추는 2인무 형태였다. 한성준은 제자인 강선영에게 왕비춤을,
손녀인 한영숙에게 왕춤을 추게 하여 두 사람이짝을 이루어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한성준의 사후에 두 제자는 각각 자신의 춤으로
태평무를 추면서 강선영류와 한영숙류로 나뉘게 되었다.
한영숙의 태평무는 붉은 단 남색 치마에 옥색 당의를 입고 쪽진 머리를 한다. 의상이 화려하지만 춤사위는 왕의 춤답게 절도와
기개의고고한 멋을 가질 뿐 아니라 발디딤새가 현란하지만 전체적으로 정갈하며 절제의 미를 갖추었다. 장단에 맞게 춤동작이
변화하며 민첩하면서도 세밀한 발동작이 특징이다. 강선영의 태평무는 붉은 단 남색 치마에 당의를 입는 것은 한영숙류와 동일하나
처음에는 입고 추었던 겉옷을 벗어놓고 추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한영숙류에서 쪽진 머리를 하는 것과는 달리 큰머리를 올린다.
한영숙류가 발디딤새가 강조된 반면, 강선영류는 디딤새와 함께 왕비의 춤답게 춤사위도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전승되는 과정에서 태평무는 한성준 당시의 내용과 형식도 변화되었다.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은 점차 약화되고, 화려하고 품위 있는 궁중복색의 위엄이 주는 장중함과 굿장단이 주는 경쾌하고 활달함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의 작은 무대에서 현대의 넓은 무대로 변화되면서 춤의 구성과 발디딤법도 현대적으로 바뀌었으며,
독무로 추었던 태평무를 무대에 따라 여러 명이 한꺼번에 추는 군무로도 추면서 춤의 구성도 더욱 화려하게 변화되었다.
태평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있어서주목할만한 점은 음악 연주자도 이수자로 함께 인정되어 춤장단의 계통을 잇게 하였다는
것이다. 처용무를 비롯하여 승무 등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무용작품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경기도 무속장단의 명인들이
거의 사라져가는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며, “음악을 들으면 춤이 보이고, 춤을 보면 음악이 들린다”며 음악과
춤이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셨던 옛 예인들의 말씀이 잘 반영된 훌륭한 사례라고 하겠다. 조닷
글 김경희(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사진 국립국악원, 한국문화재보호재단
'藝文史 展示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료, 친구, 심지어 가족까지… 내 인생을 좀 먹는 '유해인간' - 진상, 찌질이, 인간말종… 내 삶을 좀 먹는 유해인간, 어떻게 떨쳐내야 하나? (0) | 2014.02.07 |
---|---|
종이 위에 푼 예술의 목마름 (0) | 2014.02.04 |
암 투병 아내에게 바친 말...중견화가 이석조의 가슴 시린 순애보 (0) | 2014.01.27 |
"우리 교과서는 親日 아닌 克日… 90억 손해봤지만 안 물러선다" (0) | 2014.01.25 |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고려청자' 등 발굴 (0) | 2014.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