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1.27 14:53 | 수정 : 2014.01.27 15:05
- 이석조 화가가 부인을 모델로 스마트폰에 그린 그림. ‘NEW YORK’이란 글씨 속에 뉴욕에서 활동하고 싶은 자신의 꿈을 담았다.
지난해 10월 말 이석조(68) 화가가 난데없이 문자를 보내왔다.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난 지 3개월 만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전해온 뜻밖의 부고에는 그림 파일 한 개가 첨부돼 있었다. 누드의 여인이 말을 타고 파란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석조 화가는 ‘아내를 위해 그렸다’고 썼다.
화단의 이방인, 캔버스의 반란자, 스스로 광기 같은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한동안 붓을 꺾고 방황했던 기인. 그가 “예술 앞에서조차 학벌로 줄 세우기 하는 한국 미술판은 재미없다. 뉴욕에 가서 한 판 놀아보고 싶다”는 야망과 함께 미국 미네소타로 떠난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미국인인 부인의 정년퇴임을 기다리며 30여년 가슴에 품고 미뤄왔던 꿈이자 도전이었다.
“아이린의 통증은 매일 심해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진통제를 투여하는 일밖에 없다. 간암이라니. 청천벽력이었다. 아이린이 한국에서도 등의 통증을 호소하긴 했지만 고도비만으로 인한 단순 통증으로만 여겼다. 두렵고 막막하다. 새삼 아이린이 내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실감이 난다. 아이린은 내게 아내이고 친구이고 매니저이고 엄마였다. 미네소타주 서클파인즈(Circle Pines).
한국에서 온 짐은 아직 풀지도 못한 채 쌓여 있다. 아이린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이다. 아이린이 없으면 난 어떻게 사나. 아들이 하나 있지만 미국에 와서 새로 직장에 적응하느라 제 앞가림 하기도 바쁘다. 밥도 못 빌어먹던 나를 이만큼 만들어 놓은 것은 아이린이다. 아이린이 없으면 예술이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나. 아이린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는 수밖에 없다.
아이린이 통증을 호소하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오늘 밤도 잠을 자기는 틀렸다. 아이린 곁에 지키고 앉아 한국에서 가져온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지. 사용법을 모르니 이것저것 눌러본다. 모눈종이 같은 바탕화면에 드로잉을 해보니 펜이 나가는 느낌이며 선이 의외로 좋다. 색과 색을 겹칠 때 밑색이 틈새로 보이면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도 색다른 효과를 낸다. 옛날 선비들이 바위에 물로 글씨 연습을 했듯, 종이 걱정 없이 마음껏 그릴 수 있다. 캔버스가 아닌 전자기계 속에 전혀 새로운 작품세계가 들어있을 줄이야.
- (좌) 부인 아이린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부천승마공원을 찾은 이석조 화가. (우) 이석조 화가가 지갑 속에 담고 다니는 스물아홉 살 때의 아이린 사진.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아이린의 색채 감각은 화가 이상으로 뛰어났다. 화가들이 자신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좀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 그림의 색이 밝고 화려하게 바뀐 것은 아이린 덕분이다. 아이린이 그림을 보고 기분이 좋은지 농담을 던진다. “동양 화가가 그린 말이라 ‘숏다리’네. 말이 아니라 돼지 같기도 하고 귀여운 것이 당신을 닮았어.” 아이린은 고등학교 시절 말을 타고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아이린의 고향은 1980년대 한국 TV에서도 방영됐던 미국 영화 ‘초원의 집’의 배경이 된 곳이다.
말은 내게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1987년 만다라 그림을 들고 세상에 나왔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별종이 신기했던지 화단과 언론에서는 ‘만다라 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화가 이석조에게 관심을 가졌다. 1988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두 번째 전시를 앞두고 의욕이 지나쳤다.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다 진짜 미쳤다. 생사의 경계를 오락가락할 때 나를 일으켜 준 것이 말이었다. 말을 타고 몽골의 초원을 질주하면서 죽음의 유혹을 털어내고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에 취해 말 등에서 수없이 떨어지면서도 말 고삐를 놓지 않았다. 승마코치 자격증도 땄다.
말이 나한테 해줬듯이 내가 그린 말들이 아이린에게도 에너지를 불어넣었으면. 그림 속 말처럼 아이린이 벌떡 일어나 자신이 뛰어놀던 고향 땅을 맘껏 달렸으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아이린을 위한 말을 그리고 또 그렸다. 붉은 갈기를 휘날리며 땅을 박차고 일어선 청마, 꽃잎을 입에 물고 요염한 포즈로 구애하는 말, 몸을 비비며 사랑을 나누는 말…. 그중에서도 발가벗은 여인과 놀고 있는 에로틱한 말 그림은 아이린을 모델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염원과 현실은 달랐다. 말 그림이 늘어갈수록 아이린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이린의 건강 상태를 정확하게 검사할 수가 없었다. 고도비만인 탓에 아이린의 몸이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의 MRI(자기공명영상)가 없었기 때문이다. 등의 통증 외에는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걱정도 안 했다. 미국에 와서 정밀검사를 했을 때는 이미 아이린의 암세포는 수술을 할 수 없을 만큼 말기 상태로 번져 있었다. 아이린은 그 와중에도 나를 먼저 생각해 자신의 몸 상태를 속였다. “병원에서 간암 2~3기라고 했다. 방사선치료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다”면서 투병의지를 강하게 내비치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중에 병원에서 보낸 서류를 보고서야 나는 아이린이 간암 4기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린은 내 삶을 구원해 준 천사였다. 35년의 세월은 그녀를 고도비만으로 만들었지만 내가 아이린을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날씬하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성서 속의 여인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은 아이린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아이린은 미 국방부 소속으로 대구 미군부대에 있는 학교의 음악 교사였고, 나는 절에서 군불 때며 심부름 하던 백수였다. 아이린이 근무하는 학교에 같이 있던 교사 중에 친한 선배가 있었다.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풍금을 치면서 ‘오 솔레미오’라는 노래를 부르는 나를 아이린이 본 모양이었다. 자신보다 한 뼘이나 작은 동양남자가 가곡을 부르고 있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아이린은 여행가이드를 자처한 나를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기도 하고 내가 사는 절에 놀러오기도 했다. 당시 드로잉 연습을 미친 듯이 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우던 때였다.
- 2010년 주간조선 연재물 ‘화가의 아내’에 실렸던 이석조 화가와 부인 아이린.
대가들의 화집을 스승 삼아 드로잉 연습을 시작했다. 하루에 연필 2자루가 닳도록 그리다 보면 드로잉한 종이가 수백 장이 쌓였다. 달리 모델이 없으니 시내 다방에 앉아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연필을 들어 드로잉하는 연습을 했다. 손님이 자리에 앉기 직전에 이미 얼굴이 완성될 만큼 손이 빨라졌다. 미술대학 문턱도 밟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절에 놀러온 아이린이 내 드로잉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할 일 없는 건달인 줄 알았다가 그림을 보니 허투루 안 보였나 보다. “결혼해 달라”는 내 프러포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 미국에 있는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아이린의 부모는 평생 부모 말 거역해 본 적 없는 딸을 믿었다. 학벌도 없고 직장도 없는 낯선 나라의 백수 사위를 받아들였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골칫덩어리 아들 하나 치웠다고 경사가 났다. 결혼을 하고 처음 아이린의 미국 집을 찾았을 때 주눅이 들어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이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초라해 보일 것인가. 아이린 집안은 할아버지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집안이었다.
아이린은 훌륭한 교사였다. 처음 한국 땅을 밟을 때 8개월만 머물다 떠날 예정이었던 것이 나를 만나고 30년을 훌쩍 넘겼다. 근무지를 정할 때 준전시국인 한국을 선택한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아이린은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아이린은 한국인 같았고 나는 아이린보다 더 서양 스타일을 좋아했다. 아이린은 된장에 고추며 오이 찍어 먹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스테이크나 피자를 즐겼다. 아이린은 학교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현악기팀을 새로 만들어 미군이나 대사관 행사는 도맡아 했다.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남몰래 좋은 일도 많이 했다. 명절 때면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먼저 챙기던 사람이었다. 2005년엔 미 국방부가 전 세계 파견 교사 중에서 선정한 ‘올해 최고의 교사’에 뽑혀 백악관에 초대됐다. 밤 늦게까지 집에 안 돌아와 학교에 가보면 어깨를 웅크리고 일에 몰두해 있곤 했다. 그때 억지로라도 일을 못하게 했어야 했다. 손을 끌고라도 운동을 하게 했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다. 일본 페스티벌에 참가하랴 대사관 행사 쫓아다니랴 학교 행사 맡아하랴, 과로가 자신의 몸에 암세포를 키우고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지난 6월 초 정년퇴직을 하고, 7월 1일 미국으로 와서 한 달도 안 돼 암 진단을 받고 불과 2개월, 이제 아이린은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아이린의 가족들은 아이린의 고통을 보다 못해 내게 편안히 보내주자고 한다.
지난 1월 17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이석조 화가와 마주 앉았다. 지난 연말 새해를 며칠 앞두고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문자를 받은 후 몇 차례 메시지를 남긴 끝에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기자와는 2010년 ‘화가의 아내’라는 연재를 진행하면서 부부 인터뷰를 한 인연이 이어졌다. 한국에 들어온 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경기도 김포에 있는 친구 집에서 칩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그는 “아이린이 너무 불쌍하다”면서도 “한국이 어두웠던 시기에 와서 10대 경제대국이 되기까지 35년간 발전을 함께했던 사람이다. 아이린에게도 그 시기가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 했다.
그는 아이린이 떠난 후 혼자 시간을 견디는 것이 어려워 말 그림을 몇 장 더 그렸다면서 스마트폰을 열어 그림을 보여주었다. 아이린에게 바친 스마트폰 그림은 말을 비롯해 100여장이 넘는다. 그는 그중에서 50여점을 골라 자신의 글을 덧붙여 책으로 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책은 영문으로만 만들 예정이다. 아이린 가족들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다. 아이린이 ‘백수건달’과 살았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린의 삶이 의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눈물의 인터뷰를 마친 그가 지갑에 보관하고 있는 아이린의 옛날 사진을 보여주었다. 흑백의 증명사진 속에는 20대의 미녀가 천사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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