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강녕전 <경복궁> 강녕전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강녕전은 왕이 일상 거처하던 전각(殿閣)으로 사정전 뒤 향오문을 지나 침전구역의 중심을 이룬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때 Sekino의 <韓國建築調査報告>의 사진들이 많이 참고되었다. 이 사진은 關野貞(Sekino, Tadashi)의 <韓國建築調査報告>(東京帝國大學, 1904년)에서 발췌한 사진이다.(*부분 참고)
* 關野貞(Sekino, Tadashi)는 일본의 동양건축가ㆍ미술사학자로 1902년 한국에 와서 미술·건축 등을 연구하였으며, 후에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간행으로 프랑스 학사원상을 수상하였다. 1918년 6월 중국에서 당나라 때의 불교유적인 천룡산 석굴(天龍山石窟)을 발견하여 동양미술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주요저서로 《낙랑군시대의 유적》이 있고, 논문집 《일본의 건축과 예술》이 있다. 1902년 7월, 일본동경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교수 관야정(關野貞, 당시 35세)은 "한국인은 취미가 부족하여 미술애호심이 없으므로, 귀중한 문화재가 소멸하는 것을 막기위하여 적극적으로 건축조사에 나선다"는 명분과 일본정부의 명령으로 불과 두 달 남짓동안 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고조선부터 당시까지의 각종 문화재들을 조사했다. <韓國建築調査報告>에 있는 사진들을 찍을 때는 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궁을 비운 지 6년이 지난 무렵이다. 1867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어서 "황괴(荒壞)하고, 기둥이 기울고, 잡초가 기단을 덮고, 창서(蒼鼠)가 고와(古瓦)에 숨어 있어도 수축(修築)할 여유가 없을 것 같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경복궁> 영제교 <경복궁> 영제교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영제교는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다리로 근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되는 다리이다. 상상의 동물인 석수가 조각되어 있으며 다리 위의 길은 3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 길은 임금님만이 다닐 수 있는 어도로 임금님은 어가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가셨다고 한다. 서수는 천록 또는 산예라고 부르는 상상의 동물인데 본래는 16마리로 겨드랑이와 뒷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고 정수리에는 뿔이 달려 있다. 옛날에는 영제교 아래에 명당수가 흘렀다. 경복궁을 만들면서 명당수가 모자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궁궐 서북쪽의 물을 끌어다 금천을 만들었다. 경복궁의 명당수는 북악산록에서 발원하여 서쪽 담장을 따라 흐르다 영추문 근처에서 직각으로 꺾어져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지나 동남쪽 담을 통과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풍수지리상 길하다고 하는 서류동입 (西流東入)의 명당수인 셈이다.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이 다리를 해체한 뒤 명당수를 메웠다. 그 뒤 수정전 뒤뜰로 잠시 옮겼다가 해방 후 다시 해체하여 근정전 동쪽에 옮겨졌다가 현재 복원과정을 거쳐 제자리를 찾고 있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흥례문 <경복궁> 흥례문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흥례문은 광화문을 지나 실질적으로 경복궁 전각의 입구역할을 하는 문이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건물은 중층에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다.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두고,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 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로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흥례문 일곽은 1910년 경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상당부분 철거 변형되었으며, 1916년조선총독부 청사건립으로 완전 철거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물산공진회 개최 시에는 경복궁의 전반부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당수의 전각이 변형 철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례문 일곽과 담장도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2000년에 준공하였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참고)
<경복궁> 근정문 <경복궁> 근정문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으로 근정전과 함께 고종 4년(1867)에 건립된 보물 제 812호 건축물이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중층누문(重層樓門)으로 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두었다.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공포 (慊包)는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 (多包)로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단을 쌓았으며, 세 칸에 걸친 계단을 마련하였는데 중앙칸 계단은 좌우에 소맷돌을 놓고 노도(路道)에는 봉황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세부수법은 근정전과 비슷하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경회루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고종 4년(1867)에 건립한 회연(會宴)을 위한 건물로 물 속에 기단을 축조하고 세웠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로 궁내에서는 정전(正殿)인 근정전 다음으로 대규모이다. 태조는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다락집정도의 루를 세웠다. 태종은 12년(1412)에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건물의 규모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 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마침내 이룩하니,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두르고 경회루를 세웠으며,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상· 하층의 바닥은 위계를 표시한 듯 외측보다 내측의 바닥높이를 높였고 상층에는 들어 열 수 있는 분합문을 외진 · 내진 · 내내진 기둥 사이에 두어 공간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천장은 하층에서 우물천장으로 상부구조가 보이지 않도록 하였고 동남과 서남측에는 계단을 두어 상층으로 오르게 하였다. 기둥과 보, 그리고 구조재 부재들은 뜬창방과 대공(臺工)들로 간결하게 처리하여 결구되었고, 공포는 이익공(二翼工)으로 기둥 사이에 수많은 화반을 얹어 하중의 분포를 원활히 하도록 노력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처리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전체적인 축부(軸部)와의 비례가 조금도 손색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 말기 누각건축으로 대표적인 수작 건축물이다.
<참고>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ocp.or.kr
- 서울육백년사 http://seoul600.visitseoul.net
<경복궁> 영추문 <경복궁> 영추문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문(西門)으로서, 이 문은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통용문이다. 동문인 건춘문(建春門)과 같은 규모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門樓)로 된 이익공(二翼工)집 우진각지붕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각 지붕마루에는 양성이 되고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이 얹혀 있다. 또 홍예문(虹霓門)을 하나 내어 출입하게 한 축대 위에 단층의 누(樓)를 지었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의 현재 전경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전체 구성으로 보면 남문에 속한다.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진 광화문(光化門)은 대원군에 의해 중건된 후 103년 6·25전쟁에 소실된 후 현재의 모습은 18년 만인 1968년에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원래의 광화문, 즉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 정문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궁내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철거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민족감정과 양심있는 일본인들의 반대 여론에 못 이겨 경복궁 동쪽 건춘문(建春門) 이북에 이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궐문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고 문루는 소실되어 버렸다. 광화문 원래의 건축 양식을 보면 석축은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지만 숭례문에서와 같이 홍예문이 중앙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우에 각각 한개 씩이 더 있다. 이는 중앙 홍예문은 군왕이 출입하도록 하고 좌우로는 여러 신하들이 출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루의 짜임은 하층의 기둥 사이가 모두 개방되었고 상층은 판문을 달아 개폐하도록 하였다. 다포계 건물로 외2출목, 내3출목이나 내부쪽 처리는 말기적 수법인 운궁(雲宮)을 사용하였고 내목도리 아래에는 장화반(長花盤)을 놓고 공포간에는 포벽을 두었다. 가구수법도 그 골격은 숭례문과 비슷하나 하층 대들보가 고주(高柱)에서 합보 형식을 하고 대들보와 2층마루와의 사이에 공간을 두고 있는 것은 숭례문과 다르다. 상·하층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들이 배치되고 용마루 끝에는 용두를 달았다. 광화문을 건춘문 이북으로 일제시 이건할 때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의 현재 전경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전체 구성으로 보면 남문에 속한다.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진 광화문(光化門)은 대원군에 의해 중건된 후 103년 6·25전쟁에 소실된 후 현재의 모습은 18년 만인 1968년에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원래의 광화문, 즉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 정문은 일제 때 일본인들이 궁내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철거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민족감정과 양심있는 일본인들의 반대 여론에 못 이겨 경복궁 동쪽 건춘문(建春門) 이북에 이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궐문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고 문루는 소실되어 버렸다. 광화문 원래의 건축 양식을 보면 석축은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지만 숭례문에서와 같이 홍예문이 중앙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우에 각각 한개 씩이 더 있다. 이는 중앙 홍예문은 군왕이 출입하도록 하고 좌우로는 여러 신하들이 출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루의 짜임은 하층의 기둥 사이가 모두 개방되었고 상층은 판문을 달아 개폐하도록 하였다. 다포계 건물로 외2출목, 내3출목이나 내부쪽 처리는 말기적 수법인 운궁(雲宮)을 사용하였고 내목도리 아래에는 장화반(長花盤)을 놓고 공포간에는 포벽을 두었다. 가구수법도 그 골격은 숭례문과 비슷하나 하층 대들보가 고주(高柱)에서 합보 형식을 하고 대들보와 2층마루와의 사이에 공간을 두고 있는 것은 숭례문과 다르다. 상·하층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들이 배치되고 용마루 끝에는 용두를 달았다. 광화문을 건춘문 이북으로 일제시 이건할 때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교태전 <경복궁> 교태전 교태전의 현재 전경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을 지나면 교태전이 보인다. 경복궁 내에서 가장 여성스럽고 예쁘게 지어졌으며, 정면9칸, 측면 4칸 규모로 좌우로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 뒤에 위치해 경복궁의 남북 중심축의 끝부분을 이루고 있다. 태조 초년 경복궁이 처음 세워질 때는 없었다가 세종 22년(1440)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 졌었으나 고종 초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 시대에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답시고 헐어 지금은 창덕궁의 대조전으로 되어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중심 3칸에는 앞 퇴칸을 두었으며 그 안으로 6칸의 커다란 대청 마루가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정면 3칸 짜리 온돌방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이 좌우의 온돌 방은 다시 우물 정자 모양으로 칸막이를 두어 장지문을 닫으면 9개로 나누어지게 했는데, 한 가운데 큰 방을 두어 이곳에서 왕과 왕비가 주무셨으며 그 둘레의 방에 상궁이 하나씩 있어 밤새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다마 왕과 왕비의 머리를 두고 자는 동쪽 작은 방은 비워두는데, 감히 임금과 왕비 머리 위에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역시 강녕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교태전 <경복궁> 교태전 교태전의 현재 전경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을 지나면 교태전이 보인다. 경복궁 내에서 가장 여성스럽고 예쁘게 지어졌으며, 정면9칸, 측면 4칸 규모로 좌우로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 뒤에 위치해 경복궁의 남북 중심축의 끝부분을 이루고 있다. 태조 초년 경복궁이 처음 세워질 때는 없었다가 세종 22년(1440)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 졌었으나 고종 초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 시대에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답시고 헐어 지금은 창덕궁의 대조전으로 되어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중심 3칸에는 앞 퇴칸을 두었으며 그 안으로 6칸의 커다란 대청 마루가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정면 3칸 짜리 온돌방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이 좌우의 온돌 방은 다시 우물 정자 모양으로 칸막이를 두어 장지문을 닫으면 9개로 나누어지게 했는데, 한 가운데 큰 방을 두어 이곳에서 왕과 왕비가 주무셨으며 그 둘레의 방에 상궁이 하나씩 있어 밤새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다마 왕과 왕비의 머리를 두고 자는 동쪽 작은 방은 비워두는데, 감히 임금과 왕비 머리 위에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역시 강녕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교태전 <경복궁> 교태전교태전의 현재 전경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을 지나면 교태전이 보인다. 경복궁 내에서 가장 여성스럽고 예쁘게 지어졌으며, 정면9칸, 측면 4칸 규모로 좌우로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 뒤에 위치해 경복궁의 남북 중심축의 끝부분을 이루고 있다. 태조 초년 경복궁이 처음 세워질 때는 없었다가 세종 22년(1440)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 졌었으나 고종 초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 시대에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답시고 헐어 지금은 창덕궁의 대조전으로 되어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중심 3칸에는 앞 퇴칸을 두었으며 그 안으로 6칸의 커다란 대청 마루가 있으며, 그 양 옆으로 정면 3칸 짜리 온돌방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이 좌우의 온돌 방은 다시 우물 정자 모양으로 칸막이를 두어 장지문을 닫으면 9개로 나누어지게 했는데, 한 가운데 큰 방을 두어 이곳에서 왕과 왕비가 주무셨으며 그 둘레의 방에 상궁이 하나씩 있어 밤새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다마 왕과 왕비의 머리를 두고 자는 동쪽 작은 방은 비워두는데, 감히 임금과 왕비 머리 위에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역시 강녕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사정전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의 현재 전경
사정전은 왕이 사무를 보던 건물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다시 지었다. 건물은 궁궐 건물의 배치 방법에 따라서 광화문, 근정전, 강녕전과 함께 남북 축선상에 배치되었다.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되었는데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 서쪽에 천추전, 남행각에 사정문, 동행각에 득영문, 서행각에 숭현문이 있었다. (www.ocp.or.kr 문화재
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자경전 <경복궁> 자경전 자경전의 현재 전경
교태전 동쪽 자미당(紫微堂)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神貞翼王后)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준공 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 25년(1888)에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일곽이다. 고종 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욱실형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천추전 <경복궁> 천추전 천추전의 모습
사정전의 서쪽에 있고 동편의 만춘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천추전은 고종4년에 사정전과 더불어 중건되었다.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가지새로운 문물을 창제할 때 이 전각을 즐겨 이용하였다고 한다. 천테관측과 측우(測雨)의 기계를 설치한 흠경각, 보루각이 이 천추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전각에서 1452년 문종이 승하하였다.천추전은 평면이 24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공포는 무익공이고 기둥 높이는 9자로 조촐한 법식에 따라 지어졌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향원정 <경복궁> 향원정 향원정의 모습
함화당의 북쪽에 장안당이 있었다. 이 집의 북행각은 북쪽 궁성에 가까워서북행각의 문을 나서면 궁성의 암문(暗門)인 계무문(癸武門)에 이르렀었다. 이 장안당 동편에 곤령각(坤寧閣)이 있고 그 북쪽에 복수당(福綏堂)이 있었는데, 이 집 남행각의 문밖 즉 건청궁의 남쪽에 연못이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걸어 취향교(醉香橋조. 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어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근정문 <경복궁> 근정문 근정문의 모습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으로 근정전과 함께 고종 4년(1867)에 건립된 보물제 812호 건축물이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중층누문(重層樓門)으로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두었다. 평소엔 문을 닫아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공포 (慊包)는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 (多包)로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단을 쌓았으며, 세 칸에 걸친 계단을 마련하였는데 중앙칸 계단은 좌우에 소맷돌을 놓고 노도(路道)에는 봉황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세부수법은 근정전과비슷하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경복궁> 영제교 <경복궁> 영제교 영제교의 모습
영제교는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다리로 근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되는 다리이다. 상상의 동물인 서수가 조각되어 있으며 다리 위의 길은 3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 길은 임금님만이다닐 수 있는 어도로 임금님은 어가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가셨다고 한다. 서수는 천록 또는 산예라고 부르는 상상의 동물인데 본래는 16마리로 겨드랑이와 뒷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고 정수리에는 뿔이 달려 있다. 옛날에는 영제교 아래에 명당수가 흘렀다. 경복궁을 만들면서 명당수가 모자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궁궐 서북쪽의 물을 끌어다금천을 만들었다. 경복궁의 명당수는 북악산록에서 발원하여 서쪽 담장을 따라 흐르다 영추문 근처에서 직각으로 꺾어져 흥례문과 근정문사이를 지나 동남쪽 담을 통과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풍수지리상 길하다고 하는 서류동입 (西流東入)의 명당수인 셈이다.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이 다리를 해체한 뒤 명당수를 메웠다. 그 뒤수정전 뒤뜰로 잠시 옮겼다가 해방 후 다시 해체하여 근정전 동쪽에옮겨졌다가 현재 복원과정을 거쳐 제자리를 찾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 행각 <경복궁> 근정전 행각 근정전 행각의 모습
근정전 일곽의 행각(行閣)은 근정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둘려져 축을근정전과 근정문에 두고 동서로 완전대칭형이다. 남쪽의 행각은 근정문을 중앙에 두고 동서로 각각 15칸씩이며 북쪽의 행각은 사정문을 중앙에 두고 동서로 각각 17칸식이다. 동 · 서행각은 남행각과 북행각양단에서 남북방향으로 연결되었는데 동서가 각각 44칸씩 되었다. 동· 서행각에는 각각 남단으로부터 17칸째와 18칸째에 외부로 돌출된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가 붙어 있다. 또한 남행각(南行閣)·근정문 좌우에는 동과 서에 각각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어 근정문을 통하지 않고 내외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각의 건축은 북행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랑(複廊) 형식으로 건물 기둥사이 중앙에 중심주를 세웠으며 동·서행각의 건물 높이를 세 층으로두어 북쪽이 남쪽보다 높게 되었다. 북행각은 사정전 일곽에서 출입할수 있는 고방(庫房) 기능을 갖게 되어 있고 근정전 후방쪽은 토석담장으로 폐쇄되어 있다. 행각의 건축 양식은 간결한 익공식이며 중앙 고주 (高柱)가 종량을 받치는 가구 형식으로 지붕 구조를 받게 하고 있다. 벽의 설치는 외부쪽으로만 되고 내부는 열주식(列柱式)으로 북행각 제외를 제외하고 모두 개방하였다. (서울육백년사 인용)
<창덕궁> 금천교 <창덕궁> 금천교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금천교는 창덕궁의 정문과 궁 사이에 있는 다리로 1411년(태종 11년)에조성되었다. 조선의 궁궐건축에는 북(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명당수를 중요하게 여겨 궁의 정문에서 궁전으로들어가려면 이 명당수 위에 놓여진 돌다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경복궁의 영제교며 창경궁의 옥천교와 덕수궁과 경희궁에도 있었던 그런 다리가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이다. 다리의 구조를 보면 하천 바닥에 깔린기반석 위로 홍예 2틀을 만들고 멍엣돌위에 돌난간을 세우고 다리 윗부분은 장대석으로 깔았다. 중앙부의 홍예 기반석 남쪽 면에는 해태상을, 북쪽에는 거북상을 설치하였다. 이들 상 뒤로 홍예틀이 만나는 기석에 귀면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위 양쪽에는 돌로 난간을 돌렸는데, 주석이 서고 그 사이에 동자석이 설치되고 한판 돌로 만든 풍혈이 끼어 있다. 이 다리는 평면이 아니라 중앙이 들린 구릉형이다. 이 다리 앞에 명당수와 관련되는 궁의 외당문인 진선문이 있다.돈화문내원에 회화나무의 수림이 울창한데, 이는 고대부터 궁문내정에정승나무를 심는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궁의 별칭을 괴신(槐宸)이라고도 한다. 금천교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임금 행차 때 의장 행렬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데 길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만이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 돈화문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기와지붕의 다포(多包) 건물이다. 처음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 5월이었으며,《태종실록》에 의하면 이 문의 2층 문루(門樓)에는 15,000근의 대종(大鐘)을 걸었다고 한다. 문종 즉위년(1450)에 개구(改構)한 바 있으며연산군 12년에는 돈화문을 개조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실제 실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진(燒盡)되고 광해군 원년에 재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궁궐에 현존하는 중문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그런데 원래는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이있었고 그 위에 2층으로 세운 중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양식은 옛날삼국시대로부터 궁궐의 정문으로 채택되어 왔으며, 대표적인 예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이다. 광화문은 홍예문을 화강석조로 쌓은 뒤 그위에 올려 2층문루를 세운 구조로 돈화문과는 그모습이 완연히 다르다. 창덕궁의 모든 구성은 이궁(離宮)으로서의 조촐한 맛을 지니고 있는데 돈화문은 그런 구조를 대표한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창덕궁> 부용정 <창덕궁> 부용정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영화당에서 과거를 보고 급제를 하면 주합루에 올라가 왕실도서관의 수만 권의 서책을 읽으면서 능력을 함양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축수해주는 자리가 부용정이다. 정면 3칸, 측면 5칸의 단층 다각기와지붕의익공(翼工)집이다. 《궁궐지(宮闕誌):1908》에 정조 때에 개건(改建)되었다고 하며, 건물의 일부는 연못 위에 돌출되었으며 팔각의 석주(石柱) 2기가 물 속에 세워져 이 부분을 받치고 있다. 원형의 가는 기둥 위에 육각형의 주두(柱頭)가 놓이고 공포(慊包)는이익공(二翼工)으로 간소하여 주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놓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지붕은 평면과 같은 형상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부용정의 평면은亞자형이면서 변화가 많아 보이는데 연꽃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송이꽃과 같은 정자를 꾸민 것이다.동쪽에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발기창이 달린 창과 외짝의 문이 있다. 그 안의 단문을 열어젖히면 부용지를 비롯한 선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창덕궁> 인정문 <창덕궁> 인정문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인정전의 정문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다포(多包)집이다. 건물의 천장은 서까래가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문 좌우로는행각이 뻗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일부가 개조되어 건축 구조에 일본식이 섞여 있다. 정전과 같이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에 손실되었으며광해군 때에 복구되었다가 영조 20년에 다시 화재를 입고 이듬해에 중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일단 영조 21년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후에 많은 부분적인 수개(修改)가 있었다. 실상은 인정전이 소실되어다시 지어지는 순조 4년(1804)에 동시에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세종 즉위년에 개건(改建)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것을 광해조(光海朝)에중건하였으나 순조 3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 순조 4년에 중건되었다. 당시 철종 7년에 와서 건물을 뜯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가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순조 4년의 중건하는 예를 그대로 따랐으므로 건축 양식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세웠다. 다포 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창경궁> 명정문 <창경궁> 명정문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창경궁 외전(外殿)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지붕으로다포식(多包式) 공포를 갖추었다. 명정문은 정문인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지나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좌우에 행각이 가로 놓여 있다. 이들 행각은 장대석의 기단 위에 있으며 이와 같은 높이에 문의초석이 있다.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기둥열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www.ocp.or.kr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 명정전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창경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때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60.4척,측면 3칸 32.28척에 단층 팔작지붕에 다포(多包)형식을 취하고 있다.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후면에 따로 지은 퇴칸이 부속되어 있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이 기단은 지세에 따라 3면에 적석(積石)을한 것으로 전면의 중앙과 북쪽 중앙에 화강석의 계단이 시설되어 있다. 계단 중앙에는 쌍봉(雙鳳)을 부각하였으며 기단은 장대석을 쌓았고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공포를 짜았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살창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도의 병풍이 놓였다.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짜은 보개(寶蓋)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雙鳳紋)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했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창경궁> 통명전 <창경궁> 통명전 1902년의 모습
關野貞(Sekino, Tadashi), <韓國建築調査報告>, 東京帝國大學, 1904년
통면전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로 명정전 서북쪽에있다. 이 건물은 창경궁 내전의 여러 전각 중 규모가 가장 크고 기단이 이중으로 형성되었으며 단청의 수법 등이 가장 화려하여 내전을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조(光海朝) 때 재건되었다가,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14년에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정면은 7칸이고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였다. 지붕 위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전후퇴칸을 두었다. 북서쪽 일부의 방을 제외하고는 건물 내부 바닥에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원래는 정면으로 보아 양측에 2칸씩 방을 꾸몄음이, 1984년의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덕수궁 <덕수궁> 덕수궁 덕수궁의 전경
1592년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고종 33년(건양원년, 1896) 2월 11일에 고종이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에 왕태후(헌종의 계비인 홍씨)와 태자비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겨가 있도록 하였다. 같은 해 2월 16일에 고종은 경운궁의 수리를 명하였다. 이 때에 어느 정도의 수리가 있었는지 잘 알수 없다. 이후 고종은 다시 8월 10일에도 하명하여 경운궁을 수리하라하였다.이 공역은 대략 9월 28일에 끝이 났던 것으로 이 때 궁내부(宮內府)에서 ‘경운궁의 역소공역(役所工役)이 선준(先竣)되었다'는 상주(上奏)가 있었다. 19세기 말의 대한제국 역사의 중심지로 고종는 이곳을 중심으로 가로체계 등 도시 구성을 다시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한다. 근처의 정동이 한말 외교의 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그 시기덕수궁의 위상과 관련이 깊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광명문 <덕수궁> 광명문 광명문의 모습
대안문(大安門)과 중화문(中和門) 사이에 있던 덕홍전(德弘殿)의 정문으로 덕홍전 남행각의 중심에서 남향하였던 삼문이다. 원래 함녕전 남쪽에 있었는데, 흥천사 종과 자격루 등을 전시 할 목적으로 일제 때 지금의위치로 이건되어 문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문형식으로, 중앙 도리간에 판비가 있었으나 이건되면서 없어졌다. 가구는 원주 위에 주심포를 올리고 창방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얹어주심도리를 받고 있으며, 맞보형식의 대량을 중심고주에서 받게하여중도리를 얹고 있다. 문의 가구 기법은 견실하며 전문(殿門)으로서는규모도 크고 내용도 충실하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석어당 <덕수궁> 석어당 석어당의 모습
덕수궁내의 유일한 이층건물로,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해에다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시좌소,時坐所)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중층이면서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친근감을 준다. 현재 중화전(中和殿)의 동북 뒤편에 있으며, 즉조당(卽祚堂)과는 앉은 자리가 축에 맞지 않는다. 선조가 파천에서 처음 시좌소로 삼았을 때는 이 건물밖에 없었기 때문에 배설(排設)에 구애되지 않았다. 1904년에 불탄 것을 그 자리에 다시 중건하였다. 현재는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이름나 있다. (www.ocp.or.kr 문화재청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준명당 <덕수궁> 준명당 준명당의 모습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집으로 중화전 북쪽, 즉조당 서쪽, 석조전(石造殿)의 동편에 위치한다. 현존 경운궁의 건물로는 광무 8년 4월 14일에불타지 않은 건물로 남아 있는 대표적 전각이다. 고종의 침소로 사용되었으나 엄비(嚴妃)가 훙거(薨去)한 뒤에 고종은 함녕전(咸寧殿)에이어(移御)하였다. 한때 고종의 초상화와 순종의 초상화가 봉안되기도하였다. 또한 고종은 이곳에서 외국 사절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내전으로 동쪽에 자리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하다.즉조당의 퇴간(退間)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평면은 ㅡ자형으로 좌우 퇴칸에 쪽마루를두고 처마 아래로 개흘레를 설치하여 편의에 도모한 시설이 있어 주목되는 전각이다. 어칸(御間)의 3칸 전퇴(前退)는 연침(燕寢)의 예에 따라 개방되어 있다.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전각으로 방주(方柱)이고높은 기단에 세워졌으며 전후퇴(前後退)가 있고 전퇴의 일부는 개방되었다. (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중화전 중화전의 모습
이 건물은 조선조 최후의 궁궐인 덕수궁의 정전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1902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전전각(全殿閣)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 즉조당 <덕수궁> 즉조당 즉조당의 모습
중화전의 북쪽에 잇는 연침(燕寢)으로 중화전의 북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중궁전(中宮殿)으로 사용하여 엄비(嚴妃)가 소거(所居)하였다. 원래 인조가 즉위하였던 역사적 건물이기도 하여 중요시되다가 광무 8년 재해를 입어 다시 중건되었다. 궁의 침전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으나,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간결하고 짜임새가 돋보인다. 전면 동쪽으로 편향하여 3칸의 퇴(退)를 두어 개방하였고, 내부는 거실로 이용하였다.건물에 비해 높은 기단을 두었고, 서쪽의 준명당과 연결되도록 2칸 복도를 두고 있다. 평면은 ㄱ자형이며 지금도 내부에 옛스러운 두껍닫이나 문짝들이 남아 있다. 광무 원년에 태극전(太極殿)이라 바꾸어 불렀으며 광무 6년 5월에는 법전(法殿)을 중화전(中和殿)이라 하고 전의중화전을 즉조당(卽祚堂)이라 환칭(還稱)하였다. 순종이 이 곳에서 즉위하고 융희 원년이라 연호하였다. 광무 원년에는 즉조당에 경효전(景孝殿)을 이안(移安)한 바 있었고 고종 5년에는 열성(列聖) 영정을 권안(權按)한 바 있다. 즉조당 앞에는 괴석이 있는데 덕수궁에는 원래괴석을 배치한 공간이 없었다고 한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침전 주위에 괴석이 배치되어 있으므로, 1984년 창경궁에서 옮겨와 침전이었던즉조당 전정(前庭)에 괴석을 배치한 것이다. (www.ocp.or.kr 문화재청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함녕전 <덕수궁> 함녕전 함녕전의 모습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녕전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불어 ㄱ자형으로 되었다. 방주(方柱)에 초익공(初翼工)으로 겹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이다. 월대(月臺)처럼 구조한 고설(高設)의 석대(石臺)가 인상적이다. 좌우에 모양을 달리한 점과 활주(活柱)가 지상에까지 내려 딛고 있는 점 등에 특색이 있다. 앞에서 보면 중앙 3칸은근간으로 하여 개방하였고, 이는 연침(燕寢)의 통식(通式)을 따른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전부 거실로 이용하도록 되어 있으며, 건물이 거대한 데 비해 장식은 간결하다. 조선조 왕의 침전으로서는 최후에 창건된 전각이다.함녕전의 창호는 사분합의 띠살문을 전면 3칸에 달고그 위쪽으로 광창(光窓)을 달아 실내 조명을 밝게 하려 하였다. 띠살분합문은 비교적 간결 단순한 무늬를 택하였고, 광창은 빗살무늬의 살을 넣어 분합문과 조화되도록 하였다. 문과 창의 시원스러움이 청간(廳間)의 공간을 한층 더 넓고 높게 돋보여 주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사이에는 장지문을 달았는데, 각 문마다 중앙에 정자살을 넣어 내부공간의 아늑함을 표출하고 있다. 대청의 한 공간 내에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한국적 공간의 실례라 할 수 있다. 함녕전과 덕홍전 남쪽의 행각이 있는데 행각의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건물은일정기에 개수되어 많이 변모하였다. 함녕전 앞에는 행각 3칸에 문을두었고, 덕홍전 앞면에도 3칸의 대문을 두고 그 좌우에 각각 3칸의 행각을 붙여 함녕전 행각과 내부에서 서로 통하게 하였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대안문 <덕수궁> 대안문 대안문의 옛날 모습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이다. 원래 이 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 개명하였다. 대한문이란현판은 조정 중신 남정철의 글씨이다. 현재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의해서쪽으로 물러난 자리이며, 궁궐의 정문이 동향하고 있는 것은 창경궁의 경우와 같으나, 원래는 중화문 앞쪽에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문의 건축양식은 단층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이다.원래는 돌계단 위에 삼문이 세워졌으나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러나돌계단은 길아래에 매몰되어 있다. 궁의 정문으로 단층인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보통 궁궐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홍화문(弘化門)과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www.ocp.or.kr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육백년사 참고)
<덕수궁> 대안문 <덕수궁> 대안문 대안문의 옛날 모습, <한국명소사진첩>, 한국출판협회, 1908년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이다. 원래 이 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대한문(大漢門)이라 개명하였다. 대한문이란 현판은 조정 중신 남정철의 글씨이다. 현재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의해 서쪽으로 물러난 자리이며, 궁궐의 정문이 동향하고 있는 것은 창경궁의 경우와 같으나, 원래는 중화문 앞쪽에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문의 건축양식은 단층의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이다. 원래는 돌계단 위에 삼문이 세워졌으나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러나 돌계단은 길아래에 매몰되어 있다. 궁의 정문으로 단층인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보통 궁궐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양),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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