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술관의 한국미술 컬렉션을 보면 일반 감상화는 빈약한 데 반해 병풍이 아주 많다. 겸재, 단원 같은 대가들의 작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궁중장식화인 십장생, 모란, 책거리병풍과 화조화, 문자도 같은 민화 병풍 그리고 국내에서는 별로 알아주지 않는 구한말의 화가인 최석환(崔奭煥)의 '포도' 병풍과 양기훈(楊基薰)의 '노안도(蘆雁圖)' 병풍이 많이 전한다.
이는 서양인들이 작은 화첩 그림인 감상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스케일이 크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병풍 그림에서 더 한국적인 멋을 발견했음을 말해 준다. 지난 3월 23일 뉴욕 크리스티에서 열린 한국미술품 경매에서도 십장생·책거리·산수·화조 병풍이 아홉 틀이나 출품되었다. 미술품에서도 내수용과 수출용이 다를 수 있는 셈이다.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의 '책거리 8폭 병풍'(부분·사진)은 진짜 명품이다. 자를 사용하여 정밀히 그린 책가(冊架)에는 전적과 함께 산호 붓걸이·옥필통·옥도장·고급 찻잔·자명종 등 귀한 문방구와 장식품이 다 그려져 있다. 구성도 멋지고 묘사도 정확하다. 책거리병풍은 정조 이래로 크게 유행했다. 정조는 임금이 된 뒤 책을 멀리하게 되자 책거리병풍을 펴놓고 스스로를 경계했다고 한다. 또 정조 때 문인인 이규상은 '일몽고(一夢稿)'에서 단원은 투시도법의 책거리그림에 능해 당대의 귀인치고 안 가진 자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 병풍에 그려진 도장을 보면 '이응록인'이라고 분명히 읽을 수 있어 화가가 숨은그림찾기 식으로 자기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철종 때 화가인 이형록(李亨祿)이 똑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나타낸 책거리병풍(리움 소장품)이 있어 동일인물로 보인다. 이처럼 어엿한 화원이 그린 대작이기 때문에 예술성이 의심되지도 않으며 오늘날 외국에서 당당히 한국회화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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