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미술관에 소장된 125점의 한국 도자기 중 '분청자 물고기무늬 편병(扁甁)'(사진)은 아주 희귀한 명품이다. 편병은 휴대용 술병으로 양옆을 평편하게 하여 망태 속에 넣고 다니기 편하게 디자인된 것이다. 고려 말 상감청자부터 나오는 기형이지만 조선 초 분청자에 들어와서 크게 유행했다.
편병에 무늬를 넣는 것은 상감기법, 양각새김, 음각새김, 철화(鐵畵)그림 등이 두루 사용되었는데 대개 좁은 면에는 추상화된 꽃무늬로 테두리임을 나타내고 양쪽 둥근 면에는 연꽃, 모란꽃, 물고기 등을 그려 넣었다. 연꽃, 모란꽃은 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인데 물고기무늬는 분청자에서만 나오는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다. 왜 조선 초 분청자에 물고기무늬가 편병뿐만 아니라 병, 항아리, 대접에 그렇게 많이 나타났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다만 고려 귀족문화에서 조선시대 사대부문화와 서민문화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생긴 취미와 기호의 변화였음만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편병에 그려진 물고기의 모습은 아주 다양하다. 큼직하게 한 마리가 묘사되거나 두세 마리가 옆으로, 또는 아래위로 헤엄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X자로 교차하는 기발한 구성도 있다. 그중 이 편병은 네 마리가 나란히 줄지어 가는데 한 마리가 역방향에서 몸까지 뒤집으면서 헤집고 끼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새끼 한 마리가 여유롭게 노닌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재미있는 구성이다. 한때 분청자 편병은 물고기 숫자에 따라 값이 매겨졌다고 하니 엄청 고가였을 것 같다.
시카고미술관에서는 이런 명품들이 아담한 한국미술 전시실에 보기 좋게 전시되어 왔는데 한 유학생이 현지에서 내게 메일로 알려오기를 근래에 일본미술실을 확장하면서 한국실을 차지하여 우리 미술품은 복도로 밀려나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다며 "이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라고 안타까워했다. 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풀어가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나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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