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20 12:05
- 이유태 화백의 퇴계 영정(왼쪽)과 신윤복 '미인도'를 변형한 그림.
<‘유석재의 新천장지구’는 오래된 고전(古典)의 책갈피 속에서 디지털이 지배하는 21세기의 삶에도
여전히 유효한 ‘물통속의 물 한방울’을 찾는 시리즈입니다.>
士忘去就, 禮廢致仕,
虛名之累, 愈久愈甚,
求退之路, 轉行轉險.
(사망거취, 예폐치사,
허명지루, 유구유심,
구퇴지로, 전행전험)
선비가 거취를 망각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예도 모르게 돼, 허명이 쌓이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고
퇴로를 구하는 길이 갈수록 험난해졌다.―‘퇴계전서(退溪全書)’ 상(上)
기생놀음이 뭐가 자랑스럽냐고?
“양반들이라는 게 다 그렇게 기생놀음이나 한 거지, 뭐.”
10여년 전, 충북 단양 출신의 한 친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이죽거리는 표정에선 ‘아무리 유명한 양반이라도
별 수 있었겠느냐’는 조소가 묻어났습니다.
그 ‘별 수 없는 양반’이란 다름아닌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었습니다.
한국철학사를 대표하는 학자로 성인(聖人)의 반열에까지 올랐던 퇴계를 그저 ‘그렇고 그런 인물’로
치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 그의 고향이 단양이라는 것을 알고 제가 물어봤던 겁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를 지낼 때 유명한 기생과 로맨스를 펼쳤다는 얘기를 아느냐”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칠십 평생을 고매한 철인(哲人)으로 살았다고 여겨지는 퇴계의 딱딱한 삶에서,
조금이나마 인간적인 체취와 풍류를 드러내는 에피소드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더구나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흐른 지금에는 이 이야기를 오히려 퇴계의 치부를 드러내는 약점처럼 보는 사람도 없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 그깟 ‘풍류’라는 건 결국 성매매의 다른 표현 아니냐. 조선시대 관기(官妓)란 사실상 공창(公娼) 아니었느냐. 이렇게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게 된 것입니다. 소설가 복거일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생의 생애를 생각해 보세요. 전형적인 성노예지요.
애비가 누군지도 모를 아기를 낳아서 또 기생으로 키우는 겁니다. 이는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흑인 노예보다 더 불행한 삶입니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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