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02 03:14
만주를 떠돌던 백석(白石)이 광복을 맞아 압록강 건너 돌아왔다. 서른세 살 시인은 남(南)신의주 유동(柳洞)에 있는 목수 박시봉네(方) 삿자리 깐
방 한 칸을 빌려 머문다. 그의 마지막 서정시이자 대표작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쓴다. 그는 삶의 덧없음과 고달픔, 슬픔에 뒤치다
운명의 큰 힘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독백 같은 시를 이렇게 맺는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북방 산속 갈매나무는 재질이 치밀하고 단단해 공예품과 가구에 썼다. 백석은 홀로 정(淨)하게 서서 눈을 맞는 갈매나무처럼 살겠다고 다짐한다.
외로움에 무릎 꿇지 않고 어둠과 타협하지 않겠다 한다. 그는 고향 정주에 남았다. 어지러운 해방 공간이 싫었던 그에겐 남과 북이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6·25 때 남으로 가자는 후배 고정훈의 권유도 뿌리쳤다. "가족과 고향을 버리지 않겠다. 더러운 글을 쓰지 않고 번역만 하겠다."
▶백석은 번역과 동시에만 매달렸다. '더러운' 선전용 정치 시를 쓸 순 없었다. 1957년 북한 문단에서 아동문학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동시가 계급을 강조하기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했다가 '복고주의자'로 몰렸다. 그 무렵 '북한신문'이 백석의 동시
'메돼지'를 비판한 글이 그제 출간된 '북한의 시학 연구'에 담겼다. 북한 시인 쉰 명을 가려 작품과 평론을 여섯 권에 모았다.
▶'메돼지'에선 감자밭을 들쑤셔놓고 잠든 멧돼지가 쟁기를 끄는 꿈을 꾼다. 재치가 돋보이지만 "아동들에게 주려는 것이 명백하지 않다"는 공격을 받았다.
백석은 59년 '삼수갑산'의 오지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으로 '하방(下放)'된다. 전기도 없는 산골에서 양을 치던 그는 '갈매나무의 다짐'을 버리고
체제 찬양 시를 쓴다. 복권(復權)되길 바라며 '붉은 작가' 흉내를 낸다. 62년엔 그마저 절필(絶筆)한다. 유배된 운명을 받아들였다.
▶백석은 80년대 중반 아내·남매와 찍은 사진에서 딴사람 인민복을 입은 듯 야위었다. 잘생긴 '모던 보이'는 어디 가고 삶에 지친 일흔줄 노인만 있었다.
'북한의 시학 연구'에 실린 시 '눈'(1960)이 시선을 붙든다. 홀어미 열성 당원의 어깨에 내리는 눈을 '당의 은총'이라고 노래했다.
'초저녁 이 산골에 눈이 내린다. 갈매나무 돌배나무 엉클어진 숲 사이….' 거기 나오는 갈매나무도 홀로 서지 못하고 엉클어졌다.
샘솟는 시어(詩語)들을 억지로 삼키며 37년을 양치기로 살다 떠난 그를 생각한다. 슬프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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