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선생님, 어느 분이 우리 모임에 고서를 잔뜩 기증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도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없어서요. 혹시 필요하지 않은가요?"
한국학 연구자들의 모임 '문헌과 해석'의 막내 학자 장유승(37)에게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안 가져갈 정도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며칠 뒤 두 상자 분량의 고서가 집으로 배달됐다. 짐작대로 '쓰레기'였다. 먼지 풀풀 날리고 표지는 반쯤 떨어져 나가고 얼룩이 덕지덕지 묻은 데다 퀴퀴한 냄새까지…. TV 프로그램 '진품명품'에 들고 가면 입구에서 퇴짜를 맞을 이런 책을 고서 수집가들은 '섭치'라고 부른다.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아니하고 너절한 것'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그런데 널부러진 섭치들을 한참 들여다보니, 귀한 고서가 들려주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책이 낡고 너절하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거나 많이 찍어낸 것이란 뜻. 저자는 고서적 뭉치를 해방시켜 하나하나 분류하고, 스토리를 찾고, 새롭게 역사적·인류학적 가치를 입혔다. 이 작업을 그는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이라 명했다.
중국 고사성어를 엮은 '백미고사(白眉故事)'는 '곁에 두고 수시로 펼쳐볼 수 있는 조선 선비들의 전자사전'이고, '과시(科詩)'는 과거시험에 나오는 시들의 기출문제집이니 요즘으로 치면 '수능 기출문제집'쯤 되겠다. 지금 수험생들은 출판사에서 만든 참고서와 문제집을 보지만, 조선시대 과거 준비생들은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사람들의 과시문을 엮어 직접 책을 만들었다. 풍수지리책 '옥룡자답산가(玉龍子踏山歌)' 서문에는 '금강산을 유람할 때 홀연히 나타난 노인에게서 전해 받은 책'이라 써있는데, 책의 가치를 높이고 지은이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려고 당시 흔하게 써먹던 수법이란다.
갈피갈피에 적힌 메모를 통해 책 주인의 사정을 짐작하는 등 책을 만들고 베끼고 소장했던 인간들의 사연 탐방기로도 흥미롭게 읽힌다. 세월의 때와 천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고서들과 '쓰레기 더미'에서 '가치'를 건져낸 눈 밝은 젊은 학자의 노력에 박수를!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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