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11 18:41
중요무형문화재 제8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리향제줄풍류’도 이러한 풍류방의 전통으로 이어진 영산회상 한 바탕의 기악합주이다.
현존 이리풍류의 거문고·가야금·양금 등 모든 현악기의 풍류는 청파 강낙승이 전한 것이다.
이리풍류의 바탕을 이룬 강낙승은 이리 풍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는 정읍에 남아있는 풍류의 중심에 있었던 금사 김용근(金容根, 1885~1963)의 수제자로, 강낙승과 함께 풍류를 하며 강낙승의 거문고풍류를 다져 준
성암 황상규(黃祥奎, 1913~1994), 전추산에게서 배워 강낙승에게 가야금풍류를 전해준 진양수(陳良洙, 1907~1969)도
이리풍류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풍류의 전승에 있어서 그 중심에 있는 악기는 거문고이다. 현존 호남풍류의 거문고 전승계보의 정점에 김용근이 있다.
조선조 말 거문고의 대가였던 김경남과 현존 호남풍류의 시조격인 전계문(全桂文, 1872~1940)으로부터 풍류를 배워 정읍과 이리(현 익산)의
거문고풍류의 바탕을 이루었다. 김용근은 약관 20세에 같은 전북 태생으로 친구사이였던 벽남 김연수(金然秀, 1883~1932)와 함께 김경남의 문하에 들어갔다.
황상규와 강낙승이 그에게 배운 거문고풍류를 오늘의 이리풍류에 살아있게 했다. 김용근의 거문고풍류 전통이 이어진 것은 황상규와 강낙승의 덕이었다.
황상규는 김용근의 수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강낙승도 김용근에게 배웠고 황상규와 함께 오랫동안 이리풍류를 이끌었다.
황상규는 1945년에 김용근에게 거문고풍류와 가곡반주를 배웠다. 황상규의 거문고 연주실력은 아주 뛰어나 김용근의 묘비에 황상규를 자신의 수제자로 칭한
내용의 글이 남아있다. 1950년대부터 정읍의 초산율계와 이리율림계에서 거문고풍류를 연주하였다.
1972년 6월 11일에 이리율림계가 재정비 될 때 주축이 되었고 회장으로 피선되어 오늘의 이리풍류의 기반을 이루었다.
황상규는 정악만을 고집한 율객이다. 김용근에게서 배운 김윤덕金允德·신쾌동申快童 등이 산조로 돌아 산조의 인간문화재가 된 반면
황상규는 김용근의 거문고 정악을 그대로 이어받아 정악만을 고수하였으며, 이리풍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 가만히 있어도 보유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극구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의 일관된 선비기질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현존 이리풍류의 가야금풍류를 강낙승에게 전해준 진양수에 관해서는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 진양수의 가야금풍류 계보는 명확하다.
호남풍류의 시조격인 전계문에게 배운 김광석에게서 전수받아 강낙승에게 전해주어 현재의 이리풍류에 살아있다.
가야금풍류 뿐 아니라 시조에도 능했다. 성음이 좋았고 성량이 풍부한 그에게 친구들은 ‘구름 사이에서 나오는 철소리’라는 뜻으로 철운鐵雲이라는 아호로 불렀다.
정읍 김기남의 아양정에 모이는 풍류객들과도 함께 연주하였다. 아양정에 다녀와서는 늘 “풍류를 하면 새들이 와서 앉아 있다 간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거문고와 가야금뿐만 아니라 대금, 단소, 아쟁, 양금도 연주하였다. 이리풍류에서는 주로 가야금을 잡았으나 말년에 집에서는 주로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풍류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풍류방 주인들의 덕이 크다. 풍류는 혼자 하는 음악이 아니어서 여러 사람이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연주 공간을 제공한 풍류방의 주인은 음식과 잠자리까지 제공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가족에게 오래 머무는 풍류객들의 빨래 수발까지 들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어려웠던 5~60년대 늘 율객이 끊이지 않았던 전주의 한 풍류방의 가족은 “사랑방에 밥 대신 감자를 참 많이도 내 갔어요”라며
당시의 지독한 가난을 회상했다. 풍류방 주인의 사후에도 그의 가족은 찾아오는 풍류객을 위해 한 동안 사랑방을 따듯하게 불을 지펴 두었다고 한다.
풍류방의 주인들을 비롯해 풍류를 잇다가 세상을 떠난 풍류객들에게 공통된 특징이 있다. 대쪽 같은 지조, 깔끔한 선비의 몸가짐, 곧은 생각과 절제된 행동,
소유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을 언제든 어려운 이들과 나누었고 예藝를 돈과 바꾸지 않았다.
이것이 본래의 풍류문화 속에 있었던 풍류정신이었다. 대부분의 전통음악이 그저 공연용인 것에 비하면 풍류는 본래의 문화를 살려 낼 수 있는 귀한 전통이다.
그냥 생활의 한 부분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음악이다. 나이 들어 여기 저기 다니면서 맘 맞는 사람끼리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또한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두 풍류정신을 갖춘 풍류객이라면 세상은 참으로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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