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 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 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 가고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에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三南에 내리는 눈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 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 기
하루종일 눈. 소리없이 전화 끊김. 마음놓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음.
길 건너편 집의 낮불, 함박눈 속에 켜 있는 불, 대낮에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불, 가지런히 불타는 처마. 그 위에 내리다 말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눈송이도 있었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나비채를 휘두르며 불길을 잡았음. 불자동차는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달려옴. 이하 생략.
늦저녁에도 눈. 방 세 개의 문 모두 열어놓고 생각에 잠김. 이하 생략.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떠돌이 별
천문학자들은 항성을 행성보다 더 큰 일로 다루지만
나는 떠돌이별,
저 차돌 같은 싱싱한 지구 냄새에 끌려
늦봄의 김포와 강화를 떠돌았습니다.
길에는 붓꼿이 필통처럼 모여 피어들 있고
산 밑에는 수국(水菊)이 휘어지게 달려
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마니산 중턱에 올라 모든 별이 폭발하듯 떠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떠돌이별 하나가 광채도 없이
마니산 중턱에서 숨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무 것도
오늘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침에 편지 반장 부쳤을 뿐이다
나머지 반은 잉크로 지우고
<확인할 수 없음>이라 적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주소뿐이다
허나 그대 마음에서 편안함 걷히면
그대는 無名氏가 된다
숫자만 남고
가을 느티에 붙어 있는
몇 마리 까치가 남고
그대 주소는 비어 버린다
아침은 걸르고
점심에 소금 친 물 마셨을 뿐이다
우리에 나가
말 무릎 상처를 보살펴 준다
사면에 가을 바람 소리
울타리의 모든 角木에서 마음 떠나게 하고
채 머뭇대지도 못한 마음도 떠나고
한 치 앞이 캄캄해진다
어둠 속에
서서 잠든 말들의 발목이 나타난다
내일은 늦가을 비 뿌릴 것이다
풍장(風葬)
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2
아 색깔의 장마비!
바람 속에 판자 휘듯
목이 뒤틀려 퀭하니 눈뜨고 바라보는
저 옷벗는 색깔들
흙과 담싼 모래 그 너머
바다빛 바다!
그 위에 떠다니는 가을 햇빛의 알갱이들
소주가 소주에 취해 술의 숨길 되듯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
3
희미한 길 하나
골목에 들어가 길 잃었다가
환한 한길로 열리듯
아픈 이 하나
턱 속에 사라졌다가 바람 불 때
확하고 뇌 속으로 타오르듯이
세상이 세워지다 말고
헐리다 말고
외롭다 말고, 세상이
우리 모여 떠들던 광교의 술집과
잠 못 들다 홀로 몸 붙이고 잠든 방 사이
어디선가 타오른다
인왕산일까 남산쯤 혹은 낙산 그 너머일까
낙산 밑에 밀주 팔던 그 술집일까
안방에 담요 뒤집어 쓰고 화끈 달던
술항아리일까
혹은 우리들보다 더 뜨거운 우리의 골목일까
그런 골목, 우리 코트 버리고
웃옷 벗어 머리에 쓰고 허리 낮추고
불타는 마루를 빠져나와 마당을 빠져나와
대문턱에 걸려 넘어져 엎어진 채로
세상이 마르고, 세상을 태우고, 세상에 물뿌리는 소리를 듣는다
4
쓸쓸한 화령길
어려운 길 석천(石川)길
반야사(般若寺)는 초행길
황간(黃澗)지나 막눈길
돌다리 위에 뜬 어리숙한 달
(그 달?)
등지고
난간 위에 눈을 조금 쓸고
목숨 내려놓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루카치 만나면 루카칠
바슐라르 만나면 바슐라를
놀부를 만나면 흥부를……
이번엔 달을 내려놓고.
7
풍란(風蘭)이 터진다
손가락을 넣으면
빵꾸난 주머니 시원 너덜너덜 너덜
옷꿰맨 곳 터져
살 드러나고
살 꿰맨 곳 터져
뼈 드러나는가
가만,
말 꿰맨 곳 터질 때
드러나는 말의 뼈
실과 바람사이
바람과 난(蘭)사이
풍란(風蘭)과 향기 사이
에서 흰 빛깔과 초록빛깔이 알록달록 가벼이 춤추는
뼈들이 골수속에 코를 박고 벌름대는
이 향기.
12
이 세상 가볍게 떠돌기란
양말 몇 켤레면 족한 것을
헤어지면
기워신고
귀찮아지면
해어지고
(소금장이처럼 가볍게
길 위에 떠서)
아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콘크리트 터진 틈새로
노란 꽃대를 단 푸른 싹이
간질간질 비집고 나온다
공중에선
조그만 동작을 하면서
기쁨에 떠는 새들
호랑나비 바람이 달려와
마음의 바탕에
호랑무늬를 찍는다
찍어라, 삶의 무늬를,
어느날 누워 깊은 잠 들 때
머릿속을 꽉 채울 숨결의 무늬를,
그 무늬 밖에서 숨죽인 가을비 내릴 때.
14
오늘 낮에 새들한테 당했다
섬 밖 사방에서 날아와
떼지어 맴돌다
한꺼번에 나에게 달려든
저 갈매기표(標) 칼새표(標) 심장들
두둥 두둥둥
마싹 마른 다리로 벌떡 일어나
뒤를 보며 달리다
바닷가에 널어논 그물에 걸려
벌렁 나자빠져 춤추듯 누웠다
온통 맥박투성이의 하늘.
15
숲에서 나와
가까이,
땅의 얼굴에 얼굴 가까이,
그 얼굴에 볼에 가볍게 볼 비비고
그 얼굴에 입에 입 가까이
혀 가까이,
목구멍 가까이,
가볍게
몸이 가벼워져 거꾸로 빙빙 돌며 떠오르는 곳
회오리 바람이는 곳 내 죽음 통하지 않고 고장 승천하는 곳.
16
어젯밤에는
흐르는 별을 세 채나 만났다
서로 다른 하늘에서
세 편(篇)의 생(生)이 시작되다가
확 타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오늘 오후 만조(滿潮) 때는
좁은 포구에 봄물이 밀어오고
죽었던 나무토막들이 되살아나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허리께 해파리를 띠로 두른 놈도 있었다
맥을 놓고 있는 사이
밤비 뿌리는 소리가 왜 이리 편안한가?
17
땅에 떨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물방울
사진으로 잡으면 얼마나 황홀한가?
(마음으로 잡으면!)
순간 튀어올라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꽃밭에 물안개로 흩어져
꽃 호흡기의 목마름이 되기도 한다.
땅에 닿는 순간
내려온 것은 황홀하다.
익은 사과는 낙하하여
무아경(無我境)으로 한번 튀었다가
천천히 굴러
편안히 눕는다.
20
바다는 젖어 있었다.
바다와 해가 맞물려 출렁거려
그 속에서 해당화가
왕보석처럼 빛났다.
색의 창을 슬쩍 여닫는 색의 눈,
해당화를 보다 말고
인간을 향해
그냥 인간의 눈 속으로!
21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속에 사는,
미물(微物) 속에서도 쉬지 않고 숨쉬는,
혹은 채 살아 있지 않은 신소재(新素材)도
날카로이 깎아놓으면
원래의 편안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저 본능!
바람에 흔들리는 저 나무, 저 꽃, 저 풀,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의 오르내리는 저 목젖이
동식물도감의 정밀한 사진들 속에 숨지 않으려는
바로 그것!
22
무작정 떠 있다
멍텅구리배.
오늘은 흔들리지도 않는다.
허리 근질거림 참다보면
바다에 떴는지 하는에 떴는지
열(熱)에 떴는지.
처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에 정신없이 발디딘 원숭이처럼
땅 위에 떴는지.
인간으로 그냥 낡기 싫어
뒤로 돌아
생명의 최초로 되밟아가려다
생명 속에 떴는지.
24
베란다에 함박꽃 필 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친구 하나 죽었다는 편지 쓰고
편지 속에 죽은 친구 욕 좀 쓰려다
대신 함박꽃 피었다는 얘기를 자세히 적었다.
밤세수하고 머리 새로 씻으니
달이 막 지고 지구가 떠오른다.
25
희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
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검음 멈추면
소리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의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희양산 봉우리,
소리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分光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저 색!
때맞춰 하얗게 타는 산봉우리.
26
달마는 면벽(面壁) 구 년에 왜 마르지 않았는가?
달마는 마르는 대신 왜 사지(四肢)의 퇴화를 택했는가?
사지는 말없이 그의 고통과 법열(法悅) 속에
(저 소리없는 신음소리, 아악 소리,
내장(內臟)의 웃음소리, 생명의 폭발소리)
그 모두를 참으며 세포 하나하나에
미소 보내며 기다렸을까?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퇴화란 무엇인가?
혹시 진화란 퇴화로부터 뒷걸음질치는 것?
발 헛디디며 계속 뒷걸음질치다
벽에 등대고 선 나의 머리와 사지.
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이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 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길대며 위해
지니고 가리.
30
함박꽃 가지에서
사마귀가 성교 도중 암컷에게 먹히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머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 쾌감!
하늘과 땅 사이에 기댈 마른 풀 한 가닥 없이
몸뚱어리 몽땅 꺼내놓고
우주의 공간 전부와 한번 몸 부비는
저 경련!
31
마른 국화를 비벼서
향내를 낸다
꽃의 체취가 그토록 가벼울 수 있을지
손바닥을 들여다 보다가
마음이 쏟아진다
나비나 하루살이 몸에
식물의 마음 심은 가벼운 것이 되어
떠돌리라
비벼진 꽃 냄새 살짝 띠고
34
옷을 벗어버린 눈송이들이
지구의 하늘에서보다 더 살아 춤추는
우주의 변두리,
혹은 서울의 변두리 밖으로,
가고 싶다.
확대경 속에서처럼
큰 눈송이들이
공해에 찌든 몸의 옷 벗어버리고
속옷도 모두 벗어버리고
속살 그대로 날으며 춤추는
춤추다 춤추다 몸째 춤이 되는 그곳으로,
여섯 개의 수정(水晶)깃만 단 눈송이들이.
35
친구 사진 앞에서 두 번 절을 한다.
친구 사진이 웃는다,
달라진 게 없다고.
몸 속 원자들 자리 좀 바꿨을 뿐,
영안실 밖에 내리는 빗소리도
옆방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는 조객들의 소리도
화장실 가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도
다 그대로 있다고.
36
내 마지막 기쁨은
시(詩)의 액셀러레이터 밟고 또 밟아
시계(視界) 좁아질 만큼 내리 밟아
한 무리 환한 참단풍에 눈이 열려
벨트 맨 채 한계령 절벽 너머로
다이빙.
몸과 허공 0밀리 간격 만남.
아 내 눈!
속에서 타는
단풍.
37
땅속에 발목뼈 채 묻히지 못해
한없이 떠도는 원혼(寃魂)이 된들 어떠리.
원혼 가운데서도
새처럼 가벼운 원혼,
슬피 울지도 못하고
잠투정하듯
초저녁에 잠시 우는,
울다 문득 고막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38
아침에 커피 끓여 마실 때
내 입은 위(胃)와 통화한다,
"지금 커피 한잔 발송한다."
조금 있다가 위는 창자와 통화할 것이다.
"점막질에 약간 유해한 액체 바로 통과했음."
저녁쯤 항문은 입에게 팩시를 보낼 것이다.
"숙주(宿主)에 불면증 있음."
40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
피부로 마시고
내장(內臟)으로 마시고
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
진짜 꿀벌들을 만났다.
벌들이 별안간 공중에 떠서
배들을 내밀고 웃었다.
벌들의 배들이 하나씩 뒤집히며
매화의 내장으로 피어……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44
바람 소리.
저 마을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산,
낯익어 고향 같다.
개울 간신히 건너는 돌다리
낯익어 돌다리 같다.
눈 반쯤 감고 보면 모두 낯익다.
바람 소리에 흔들릴까 말까 주저하는
저 나무의 몸짓도.
언젠가 하루 구름 갠 날
눈 한번 아주 감으면
모든 게 몸서리치게 낯익어지지 않을까?
아 환한 사람 소리.
눈 지긋 감아라.
46
며칠 병(病)없이 앓았다.
책장문들이 모두 열렸고
책들은 길 떠날 채비하고 줄 서 있었다.
더러 외투 껴입고 있는 놈도 있었다.
문밖을 나서니 시야의 초점 계속 녹이는 가을 햇빛.
간판들이 선명해라
지나치는 사람들도 선명해라
책을 들고 걷는 저 여자의 긴 손.
차도(車道)에 바싹 나와 아슬아슬 서 있는
저 흙덩이의 어깨까지 선명해라.
눈이 밝아졌구나,
아 눈이.
47
내 관악산 보이는 곳에 살며
때로는 산이 안개 속에 숨는 것을 보았다.
이슬비가 안개를 벗기기도
안개가 이슬비를 다시 감싸기도 했다.
언젠가 마음 속 간직해온 것과 헤어져야 할 때,
마음의 것들 책상 위에 벌여 놓을 때,
서가에 꽂힌 책 위에도 얹어 놓을 때,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
꺼내 놓으라면,
관악산부터 내어 놓으리.
다녀온 암자들도 암자의 약수그릇도 내어 놓고,
가을 저녁 어둡기 직전 남 보지 않을 때 땅을 더듬다 말던
가랑비도.
49
늦가을 저녁 아우라지강을 혼자 만나노니
나의 유해 예까지 끌고 와 부릴 만하이.
앞산 한가운덴 잎갈이나무들 위통 벗고 모여
마지막 햇빛 쪼이고 있고,
주위로 침엽수들 침착히 서서
두 강이 약속 없이 만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다
껄끄러운 두 강 만나
고요한 강 하나 이룬다
빈 배 하나 흔들리며 떠 있다
시간이 고이지 않는다
50
오늘 서가의 지도(地圖)를 모두 버렸다.
바닷가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눈부신 눈을 맞으리.
건너편 섬이 은색 익명(匿名)으로 바뀌다가
내리는 눈발 사이로 넌지시 사라지는 것을 보리.
사라진 섬을 두고,
마음에 박혔던 섬도 몇 뽑고
마음에 들던 섬부터 뽑고
섬처럼 박혀 있던 시간들도 모두 뽑아버리고
돌아오리.
오늘 지도를 모두 버렸다.
59
그대는 상자 속을 들여다 보았는가?
낡은 티셔츠, 벙어리장갑 한 짝,
흑백 사진 몇 장,
몽당연필 한 자루,
붉은 연필로 겉장에 X표 친 노우트,
벙어리장갑 또 한 짝,
을 들치고 속을 보면
어느날 들어간 인사동 골목길
연탄 난로 위에 우동이 끓고 있는 조그만 노점 앞에서
키 큰 소녀 하나가 떡볶이를 먹고 있다.
단발머리 위로
담장 위로
벌겋게 녹슬고 있는 철조망 끝으로
타고 오른
끝이 살짝 말려 있는 나팔꽃 한 줄기
그 위론 예쁘달 것도 귀엽달 것도 없는
낮달 하나
구역질
소녀는 계속 먹고 있다.
시간이 새어나가고
아무런 부피도 무게도 자리 뜬
한줌의 느낌.
70
냇물 위로 뻗은 마른 나뭇가지 끝
저녁 햇빛 속에
조그만 물새 하나 앉아 있다
수척한 물새 하나
생각에 잠겼는가
냇물을 굽어보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
조으는가
조으는가
꿈도 없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알 식탁에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노란 유채꽃이
땅의 가슴 언저리 간질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것.
겁 없이.
밤 여울
아주 캄캄한 밤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마음속이 온통 역청 속일 때
하늘에 별 몇 매달린 밤보다
아무것도 없는 길이 더 살갑다.
두 눈을 귀에 옮겨 붙이고
더듬더듬 걷다
갈림길 어귀에서 만나는 여울물 소리,
빠지려는 것 두 팔로 붙들려다 붙들려다
확 놓고 혼자 낄낄대는 소리.
하늘과 땅이 가려지지 않는 시간 속으로
무엇인가 저만의 것으로 안으려던 것을
자신도 모르게
놓아버리는 소리.
시 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탁족(濯足)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어느 蘭의 데스마스크
낮에 잠깐 품었던 잠을 깬다.
어디 딴 세상 소리처럼 트럭 경음 들리고
무언가 메마른 것이 몸을 적신다.
우박이 내리는가
모르는 사이 베란다 쪽이 어두워지고
유리창이 자못 소란스러워진다.
베란다 화분에 빈 심지로 꽂혀 있는
며칠 전 죽은 난, 마른 줄기들.
깨긴 깨었는가?
베란다의 소리 적이 가라앉고
소리 줄어든 만큼 주위가 환해지고
화분 위엔 전에 못 보던 다리 긴
발 약간씩 뒤틀린 새들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자코메티 풍의 꼿꼿한 새들,
천천히 고개를 든다.
고개 들면 어디로 가겠는가?
유리창 소리가 가시고
베란다가 환해진다.
햇빛 드는 화분 위엔
꼿꼿이 삭은 심지의 촉루,
그래 어디로 가겠는가?
어디로?
갈 데 없는 난의 얼굴에
갈데없는 인간의 얼굴을 부비리라.
허공의 불타
- 관룡사 용선대에서
바위에 붙어 있는 풀들도 허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내민 팔들이 질긴 것 같지만
허공 쪽에서 잡으면
팔을 탁탁 끊어버린다.
그렇다. 밖으로 내민 것 끊지 않고
허공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저 아래 새들이 날고
그 밑에 바위 그림자 가라앉을 때
등 뒤에서 태양이 머뭇거릴 때
늦가을 산정(山頂) 바람 예리한 칼끝은
줄곧 옷가슴을 들치며
심장이 여기지, 여기지, 묻는다.
불타와 예수의 앞자리치고 위험치 않은 자리 어디 있으랴?
허공에 나앉은 불타,
몰래 밖으로 내미는 인간의 팔 탁탁 끊어주소!
나무뿌리에 되우 낚아채인 다리 후들거림 멎으며
허공이 텅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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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黃東奎 (1938. 4. 9 - )
본관은 제안(濟安)이다. 세련된 감수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서정의 세계를 노래해 문학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는 중견시인이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肅川)에서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해 서울에서 성장했다. 1957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영어영문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1967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70∼1971년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연구원으로 수학했으며, 1987∼1988년 미국 뉴욕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2002년 현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58년 서정주(徐廷柱)에 의해 시 《시월》 《동백나무》 《즐거운 편지》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초기에는 대표적인 연시 《즐거운 편지》를 비롯해 첫시집 《어떤 개인 날》(1961)에 실린 연작시 《소곡》과 《엽서》 등 사랑에 관한 서정시가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사랑과 미움으로 정형화되어온 전통적 연애시의 정서와는 달리 신선한 정념의 분위기를 형상화한 시인 특유의 독특한 연가를 발표해 주목받았다. 이어 두번째 시집 《비가(悲歌)》(1965)에서는 초기 시에서 보여준 긍정적인 수용의 자세와는 달리 숙명적 비극성을 담백하게 받아들여 구체화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좀더 성숙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1966년 정현종(鄭玄宗) 등과 함께 동인잡지 《사계》를 발행했다.
1968년 마종기(馬鍾基), 김영태(金榮泰)와의 3명의 공동시집 《평균율 1》을 출간하고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열하일기》 《전봉준》 《허균》 등의 시를 비롯한 이 시기 이후의 시에서는 연가풍의 애상적인 분위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의 모순을 역사적·고전적 제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보여 시적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로 이어져 모더니즘으로 자리잡았으며,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에서 더욱 확실히 나타난다.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노래한 《계엄령 속의 눈》 등의 사회비판시는 예각적인 상황의식을 표출하기보다는 암시와 간접화의 표현법을 사용함으로써 사회문제를 한차원 높게 작품화한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이어 나온 시집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에서는 작가의 독특한 시법인 극서정시의 실험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95년 《현대문학》에 연작시 《풍장 70》을 발표함으로써, 1982년 《풍장 1》을 시작으로 14년에 걸쳐 죽음이라는 주제를 계속적으로 발표해 문단의 화제가 된 연작시를 마감했으며, 이 연작시는 시집 《풍장(風葬)》(1995)으로 발행되었다. 시인의 죽음관을 엿볼 수 있는 이 시집은 독일어판으로도 출간되었다.
새로운 변화를 시적 생명력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시인은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개성적인 극서정시와 장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해 문단의 귀감이 되고 있다. 현대문학상(1968), 한국문학상(1980), 연암문학상(1988), 김종삼문학상(1991), 이산문학상(1991), 대산문학상(1995), 미당문학상(2002) 등을 수상했다.
저서에 시집 《열하일기》(1972), 《삼남에 내리는 눈》(1975),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1988),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 등이 있다. 이밖에 시론집 《사랑의 뿌리》(1976)와 산문집 《겨울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시가 태어나는 자리》(2001),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2003)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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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야기
삶과 죽음이 서로 치열하게 맞닿는 칼날 같은 경계
독일 시인 횔덜린은 시인의 눈길이 닿으면 일상의 사건은 역사가 되고, 손길이 닿으면 삶의 속됨은 신화가 된다고 했다. 황동규, 그는 바로 이런 시인이다. 그는 어디선가 다음처럼 심중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인간의 내부는 성(聖)과 속(俗)이 힘겹게 만나는 장소이고 표면은 성과 속이 따로 노는 장소가 아니겠는가. 따로 노는 게 편하다면, 편하지 않게 살고 싶다." 황동규 시심(詩心)의 우물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 그는 성과 속, 한마디로 편하지 않게 살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1982년 가을부터 구체적인 여행 체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옹근 의미에 굴착한 일련의 시를 '풍장'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 일련 번호는 무례 70까지 이어졌다. 이 지난한 시적 고련과 편력의 과정 내내, 시인은 자연의 이곳 저곳, 삶의 구석구석에서 죽음과 삶의 강강술래를 독대(獨對)하고는, 그 속에서 그것과 함께 뒹굴며 살아가는 '삶의 황홀'을 생체험 하게 된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 간격에 대한 올곧은 인식과 유한한 인간 실존의 한계에 대한 겸허한 수용을 목표로 시작한 이 여행의 첫 길목에서, 시인은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화장(火葬)도 해탈(解脫)도 없이/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놀게 해다오."('풍장 1')라며 '즐거운 고행'을 위한 출진가를 작곡한다. 숨쉬는 길(생명의 길)의 끝은 명부(冥府)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소멸의 길, 그 어두운 터널의 출구는 다시 신생의 탯줄과 기맥(氣脈)을 통하기 마련이라는 도저한 각성이 돋보인다. 토마스 만이 말했던가. "죽음의 체험이 결국은 삶의 체험이 되고 인간에의 길이 된다"고.
최근 나온 시집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에서 시인은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를 뜻하는 '홀로움'이란 신조어를 조탁한 바 있다. 그리고 마음을 다져 먹는다.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한번 다르게 살아보자고/나를 떼어놓고 살아보자고, 느슨히 살아보자고"('지상(地上)의 양식') 여기서 이런 '홀로움'의 미학은 추억의 부력으로 유지되기 마련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은 한달음에 토해 낸다. "추억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산당화의 추억') 오늘도 시인은 저 홀로움과 추억이 맞닿는 길을 찾아 여전히 끝없는 떠남 속에 있다. (류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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