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5.20 03:03
- 방현철 경제부 기자
제가 주로 취재하는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본점에는 미술 작품들이 많습니다.
북창동 쪽으로 난 후문 광장에는 ‘분수령’이란 이름이 붙은 김오성 작가의 여성 누드상이 바위에 한 발을 걸치고 서 있는 모습으로 있구요.
신관 건물 중간 2층 로비에는 김창희 전 동국대 교수의 ‘81-4연(姸)’이란 한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든 작은 여성상이 있지요.
1층 로비로 가면 정대현 작가의 ‘낙원’이란 작품도 있습니다. ‘낙원’은 두 여성이 마주 보며 머리 위로 손을 맞잡은 모습입니다. 1층 구내식당
뒤편으로 가면 ‘강언덕’이란 이름이 붙은 여성의 좌상이 있습니다. 곳곳에 누드 조각상을 포함해 여성을 모티브로 한 추상 조각상이 많이 있습니다.
- 한은 구내 식당 옆에 있는 '강언덕'이란 이름의 조각상.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많은 여성 누드 조각상이 있는 이유에 대해선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혹자는 기획재정부 등 정부의 경제 정책 당국이 ‘성장’을 추구하는
공격적인 ‘남성성’을 지녔다면, 한은은 물가 안정을 추구해 경기 과열을 조정하는 보수적인 ‘여성성’을 지녔다는 걸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노동력 창출의 원천인 젊은 여성(가임여성)의 예술적 원형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부가가치 창출 지휘본부인 중앙은행에 설치해 한국은행의 존재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출산이 모든 생산 행위의 원초적인 출발점이고, 시장경제 체제에서 그런 역할을 한은이 한다는 분석입니다.
한국은행은 1987년 현재 위치에 본점 신관 건물을 신축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누드 조각상을 전시한 것이 큰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일부 한은 간부들은 “공공장소에다 저런 조각 작품을 세우는 것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다”고 했지만, 박성상 당시 총재가 강력주장해서 조각품을 한은 곳곳에 세웠다고 합니다.
본래 여성 누드 조각상은 건물 앞 잘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박성상 총재 이후 후임 총재들이 ‘외설스럽다’며 안 보이는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해 후미진 곳들로
옮겼다는 군요. 실제로 처음 한은에 온 사람들은 이런 누드 조각상들을 찾기조차 힘듭니다.
- 한은 뒷마당에 있는 '86-8 휴일'이라는 이름의 조각상.
한국은행이 왜 1300여점의 고급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을까?
그런데 좀더 살펴 보면 한은은 여성 누드 조각상 외에도 많은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여성성’ 강조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요?
일례로 한은 신관 1층에 '물가안정'이라는 커다란 네 글자 아래에 있는 대형 부조(浮彫) 작품은 한국 추상조각의 1세대 작가 중 한 명인 엄태정 서울대 명예교수의
‘번영과 영광’이라는 작품입니다. 가로 7m, 세로 4.5m 크기의 대형 작품인데, 여러 사람이 손을 잡고 뛰어가는 모습을 회색빛 석조로 형상화했습니다.
1987년 신관 건물 완공시 이 작품을 사들여 1층 로비에 걸었다고 합니다.
한은에 확인해보니 한은은 한국화 625점, 서양화 396점, 서예 225점, 조각품 46점 등 총 1300여점의 미술품을 소장 중입니다. 이는 웬만한 미술관에 뒤지지 않는
소장품 규모라고 합니다.
- 한은 로비에 있는 '81-4 연'이란 이름의 조각상.
한은에는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갈필(渴筆)기법을 사용해 한국화의 새로운 정형을 완성한 청전(靑田) 이상범의 수묵산수화
'야산귀로(野山歸路)'와 천경자의 한지채색화 '어군(魚群)', 조중현의 '우중구압(雨中驅鴨)'등 명품급 한국화는 물론 김인승의 '독서하는 여인',
심형구의 '수변(水邊)' 등 미술계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근대 유화작품들도 있습니다.
한은내 미술품들은 장부가격로만 39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은이 1950년대 정부의 미술 장려 정책 때문에 미술작품들을 많이 구입했다고 합니다.
6·25전쟁 이후 붓을 꺾고 길거리에 나앉는 작가들이 급증하자 정부가 한은을 동원해 이들의 미술작품을 사들이도록 했다는 것이지요.
당시엔 돈이 있던 곳이라고는 한은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으니까요.
한은의 미술품 구매는 작가들에게 ‘가뭄 속 단비’와 같았다고 합니다. 사정이 다소 호전된 1980년대에도 이런 정부 방침은 ‘문화예술진흥법’으로 이어졌습니다.
문화예술진흥법 9조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는 건축비의 0.5~0.7%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미술품을 사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 2011년 7월 26일 웬만한 미술관보다 더 많은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 1층 창고의 모습. 한은은 6.25전쟁 이후 미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 1300여점을 매입했다. /조선일보DB
그래서 한은은 본관과 별관을 신축할 때마다 미술품을 사들였습니다. 당시 한은은 각 지방 본부를 통해 지방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지방 화단의 활성화에도 이바지했다고 합니다.
단적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독학으로 조각 예술을 익힌 김오성 작가의 여성 누드 조각상에 대해 한은은 높은 작품성을 인정해서 당시 1500만원을 주고 사들였습니다.
한은은 2008년 2월 이종상 화백의 신사임당 초상화를 매입해 이 그림을 토대로 5만원권 도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 한은 신관 앞 기념비.(김중수 총재 때 세운 것)
일반 시민들은 구경조차 힘들어, 자화자찬성 업적 자랑용 기념비 ‘눈쌀’
하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은이 보유한 미술품들이 시민들과 갈수록 동떨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경내에 있는 각종 조각상들은 한은의
보안 강화 및 출입 통제로 대중들이 감상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른 미술품들도 본점 화폐금융박물관 2층 한은 갤러리에서 수십점씩 전시하는 게 고작입니다.
나머지는 한은의 본점과 각 지점 사무실에 미화용(美化用)으로 걸려 있거나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은 한은 마당에 있는 두개의 기념비입니다. 신관 건물 입구에 있는 2012년 1월 세운 기념비에는 “한국은행의 금융안정 책무를 강화한 제8차
개정 한국은행법이 2011년 12월 17일 시행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즉, 한은법 제1조에 ‘물가안정’ 외에 ‘한국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금융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을 기념한다는 거죠. 이 내용은 김중수 현 한은 총재가 본인의 업적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맞은편에 있는 기념비에는 “한국은행의 역할을 넓히고 중립성을 강화한 제7차 개정 한국은행법이 2003년 8월12일 국회를 통과하여 오늘부터 발효된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2004년 1월에 세운 이 비석의 내용 역시 박승 당시 총재가 이뤄놓은 업적 중 하나를 자랑하는 것이지요. 7차 개정 한국은행법이란
7명의 금통위원 중 본래 있던 증권업협회장 추천 자리를 없애고 대신 한은 부총재를 당연직 금통위원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은 총재와 부총재가
모두 금통위원이 되니 한은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될 수 있는 표가 7표 중 1표에서 2표로 늘어나 한은의 영향력이 확대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 한은 마당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박승 총재 때 세운 것)
비석 내용에 직접표현은 안 돼 있지만, 비석을 세울 당시 총재인 박승, 김중수 두 사람 개인에 대한
‘송덕비(頌德碑)’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도 본인 임기 중에 세운 것이니, 뜻있는 한은 사람들은
그 기념비를 볼 때마다 ‘부끄럽다’고 생각한답니다. 꼭 기념비를 세워야 법 개정 내용이 기억되는 건 아니니까요.
더욱이 한국은행 어디에도 한은의 독립성을 높인 법 개정을 기념하는 비석이나 표지판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1998년 한은법 개정을 통해 예전까지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맡았던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한은 총재가 맡게 됐습니다. 이처럼 의미있는 일에 대한 기념비는 없고,
그것과 비교해서 작은 내용을 개정한 한은법 개정에 대한 기념비만 있다는 게 우리나라 중앙은행의
현주소이자 의식 수준인 듯해 썩 좋아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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