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원효대사 특별전'(21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신라 불교를 반석에 올려놓은 분이자 단군 갑자 이래 한국 지성사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대학자이다. 그럼에도 전국 어디에도 원효대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없다. 그런 안타까운 가운데 열린 전시회여서 모처럼 당신의 일대기를 유물 유적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하려다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뒤 "일체가 마음에 달렸다"고 크게 깨닫고는 유학을 포기하고 유행승(遊行僧)이 되었다. 그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에서 '정토의 깊은 뜻은 본래 범부(凡夫)를 위함이지 보살을 위함이 아니다'라며 불교 대중화에 나섰다. 그런가 하면 '대승기신론'을 비롯한 경전의 해석에서 그를 따를 이가 없었다. 그의 저술은 240편에 이른다. 그는 파계하여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을 떠받들 기둥을 베어오겠노라"고 노래하여 과부인 요석공주와 결혼해 설총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원효는 훗날 하나의 전설이 되어 전국 사찰 중 120곳이 원효 창건으로 되어 있다.
이런 원효대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번 특별전에는 9폭의 원효대사 영정이 출품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19세기와 20세기에 그려진 일종의 상상화로 원효대사의 원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직 일본 고잔지(高山寺) 소장본<사진>만이 실제의 이미지에 가깝다. 15세기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묘에(明惠) 스님은 원효와 의상을 숭배하여 이 절에 두 분의 영정을 모셔두었던 것이다. 족좌에 신발을 벗어놓은 것부터가 고식(古式)이며 더부룩한 수염과 검은 피부의 담대한 인상은 원효의 파격적인 행적에 아주 걸맞아 대단히 큰 감동을 준다.
비록 원화는 출품되지 못했지만 국립경주박물관이 정밀 복제한 이 영정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인 원효대사의 이미지를 전하는 데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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