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2.04 15:49 | 수정 : 2013.02.04 15:57
일러스트 이철원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302/04/2013020401364_0.jpg)
채혜선(33)씨는 친구도 많고 논리적 사고도 뛰어난 편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책 읽기가 힘들었다. 글자가 많으면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의미 파악이 안 됐다. 단어 사이의 여백이 팽창돼 강물 줄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파’와 ‘과’가, ‘2’와 ‘5’가 종종 헷갈렸다. 얼마 전엔 비행기에서 자리를 잘못 앉았다. ‘37F’를 ‘32F’로 잘못 봤다.
취학 전, 세 살 아래의 동생이 채씨보다 글을 잘 읽었다. 처음엔 그저 ‘동생이 나보다 똑똑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진이나 그림, 음악 면에 있어서는 채씨가 남보다 월등했다. ‘저 아이는 남들과 다른 아이’라고 생각한 채씨의 어머니는 그에게 오디오북을 들려주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눈으로 의미 파악이 안 되던 텍스트를 소리로 들으니 단번에 이해됐다. 결국 그는 남들보다 늘 몇 배의 노력을 하면서 자랐고, 경희대 국제경영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어 영국으로 유학 간 그는 ‘난독증(難讀症·dyslexia)’ 진단을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 영국인 지도교수의 권유로 받게 된 난독증 테스트에서 4단계 정도(중간 수준)의 진단을 받았다. 그는 “그 순간 인생시계의 처음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며 “그동안 내가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가 해소됐고, 자신감도 찾았다”고 말했다. 그의 아이큐는 139. 지난해 귀국한 그는 대기업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난독증을 위한 한글 서체를 개발 중이다.
난독증 유형도 다양
난독증은 말 그대로 읽기 장애다. 지능이나 대인관계 면에서는 문제없지만 문자를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학습장애다. 어릴 때 똑똑했지만 입학 후 학습장애를 겪는다면 난독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난독증의 종류는 ‘난독증 환자의 수만큼 많다’고 할 정도로 많다. 문자를 읽지 못하는 경우, 읽어도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순서가 뒤바뀌어 보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양파’를 ‘양과, 파양, 야파’ 등으로 읽기도 하고, ‘양양, 파파, 양파’라고 읽기도 한다. 제대로 읽어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의미 파악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떤 경우 ‘마늘’로 읽기도 한다. 유형도 여러 가지이고, 같은 유형이라고 해도 증세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난독증의 원인은 뇌 구조의 결함 때문으로 본다. 읽기는 텍스트를 ‘판독’하고 ‘이해’하는 두 행위가 결합돼 이루어지는데, 난독증의 경우 판독을 담당하는 뇌 부위, 이해를 담당하는 뇌 부위, 이 둘을 연결하는 뇌의 회로, 이 세 부위 중 한 곳 혹은 여러 곳에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유전될 가능성이 크다.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의 경우 꾸준한 학습을 통해 읽는 능력이 발전하지만, 난독증의 경우 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습 방법으로는 읽기 능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난독증 환자 중에는 남다른 통찰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뇌의 일정 부분에 결함이 있는 대신, 다른 부위가 강화된다는 이론이다. 문자로 된 텍스트가 아니라 그림이나 구조 등으로 직관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건축이나 디자인, 음악이나 체육에서 소질을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에디슨, 윈스턴 처칠, 아인슈타인, 피카소, 톰 크루즈 등이 그 예다. 영화배우 톰 크루즈는 매니저가 대본을 읽어주면 이를 외워서 연기했다. 화가이자 과학자였던 다 빈치는 거울에 비친 문자를 보듯 거꾸로 기록했고,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청소년기까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거짓말 판독’ 능력이 있는 독일인 난독증 환자도 있다. 그는 정치인의 연설을 보면 한눈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고 한다. 말로 이루어지는 언어 대신, 표정이나 보디랭귀지에 대한 이해력이 강화된 경우다.
앞서 언급한 채혜선씨는 텍스트를 그림으로 인식한다. 그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기억해낼 때 눈을 감는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이 몇 년에 일어났는지를 기억해내기 위해 눈을 감고 해당 페이지 전체를 그림으로 불러낸 후 ‘년’으로 된 부분을 찾아내는 식이다. 그는 텍스트 이해에는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림이나 사진, 음악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공부가 쉬웠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면 화성이나 음계를 척척 알아맞힌다고 한다. 그는 대입 수능에서 언어영역에서는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수학과 과학 점수는 매우 높았다.
인도 영화 ‘지상의 별처럼’. 난독증이 있는 주인공 이샨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 덕분에 문제아에서 미술천재로 거듭난다.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302/04/2013020401364_1.jpg)
난독증은 인구의 5% 이상에게서 나타나는 흔한 증상이다. 영어권의 경우, 경미한 수준의 난독증까지 포함해 15~20%다. 한글과 영어는 문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유병률이 낮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아니다. 영어는 한 음운이 낼 수 있는 소리가 많은 ‘심층성 철자구조’이고 한글은 한 음운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정해져 있는 ‘표층성 철자구조’이기 때문에 영어에 비해 읽기 장애의 확률이 낮지 않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발달성 난독증은 선천적 결함이기 때문에 문자구조와는 상관없다. 국내에도 5% 이상, 즉 240만명 이상이 난독증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난독증 진단을 받은 사람은 최근 5년간 통틀어 1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뇌 손상에 의한 후천적 난독증을 논외로 하고 선천성 난독증(발달성 난독증)의 경우 10세 이전에 발견하면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국내에는 난독증에 대한 인식이 미미해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독증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등 다른 학습장애와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다 보니 ADHD 치료에 매달리다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단순히 ‘말이 좀 늦는 아이인가 보다’ ‘기다리면 언젠가 글자를 익히겠지’ 하며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국내에서 난독증 관련 연구 논문을 최초로 낸 남기춘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의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난독증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고 머리가 나쁜 아이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을 못 읽고 이해를 못하다 보니 10명 중 8~9명은 공부를 잘 못한다. 자신감이 결여되다 보니 사회성에도 문제가 생기고 성격도 변한다. 읽기 장애가 다른 장애로 이어지는 것이다.”
난독증에 관한 국내의 연구는 걸음마 단계다. 1990년대 중반 남기춘 교수를 시발로 대학 심리학과, 소아정신과, 언어학과 등에서 난독증 연구를 하고 있으나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난독증 관련 논문은 통틀어 10편이 안 되고, 국내에서 출간된 ‘난독증’ 관련 단행본 역시 10권이 안 된다. 그나마 국내 저자의 책은 한 권도 없다. 십수년 전에 외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번역한 책들이다.
최근 난독증 분야에서 국내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혜숙 박사의 말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후천성이든 발달성이든 난독증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 유병률도 파악이 안 됐고, 제대로 된 평가도구도 없다. 평가도구가 개발돼야 제대로 된 치료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치료는 더더욱 힘든 단계다. 외국에는 초·중·고교마다 언어치료사가 있다. 난독증이 발견되면 바로 언어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관과 연결돼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요원한 얘기다.”
채혜선씨는 “영국에서는 난독증증명서가 있으면 다양한 지원을 받는다”며 “도서관에서 대출 기간도 두 배로 늘려주고, 시험 시간도 늘려준다. 난독증을 위한 PC도 한 대씩 보급되고, 일대일 치료도 받는다”고 말했다.
'育兒에 도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우는 아이는 서서 안고 달래야 얌전해질까 (0) | 2013.04.19 |
---|---|
아이가 좋아하는 스마트기기로 아빠와 놀면 정서 발달 도움돼요 (0) | 2013.03.21 |
휴일인데 아이 불덩이면 119에 문의 (0) | 2013.01.18 |
김찬재 (0) | 2013.01.16 |
아이들 비만, 부모로부터 대물림된다 (0) | 2013.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