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yellowday 2013. 1. 27. 18:39

정묘호란(丁卯胡亂)은 조선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후금명나라와는 불가능

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배경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 그의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뒤의 사고 정비, 서적 간행,

호패의 실시 등으로 눈부신 치적을 올렸다. 밖으로는 1618년 여진족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만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 정세에 대처하여 현명한 외교 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하려 노력하였다.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는 그 요청에 못 이겨 강홍립으로 하여금 1만여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조케 하였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은

대패를 하고, 이어 《아부달리 전투》에서도 연패한 명군이 불리한 상황에서 《부차 전투》에서 포위 공격을 당해 고립된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고, 이 때문에 후금의 조선에 대한 보복적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양국 간에 별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다.

본래 홍타이지(청 태종)는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평 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하여 왔는데, 이는 청나라의 남진

정책에 대한 배후의 우려를 제거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은 조선에는 전의가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광해군의 권유로 평안북도 철산가도에 주둔하여 요동의

회복을 획책하며 후금을 자극하였다.

 

한편 광해군은 국경의 경비에 유의하여 군비를 게을리하지 않아 성지(城池)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그러나 광해군은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 등 많은 왕족들을 숙청하였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등 당시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1623년 인조 반정을 일으킨 서인에 의하여 물러나게 되고

인조가 즉위하게 되자, 인조를 옹립한 서인은 국제 문제에서 광해군의 관망적 태도를 버리고 향명배금(向明排金)의 정책을

뚜렷이 내세웠다. 조선의 이러한 정책의 변화에 대하여 후금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한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때에 1624년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윤의 아들, 한윤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모문룡을 원조해 주며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조선을 쳐서 모문룡을

고립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를 하고 누르하치가 사망을 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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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 1월 14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후금군의 일부는 가도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고

[1]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 24일에는 평양을 함락

하였다. 인조는 부랴부랴 1월 25일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2]

안주성에서 남이흥,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

전사시키고 평양을 거쳐 1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정의 신화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결과

강화도에서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에서도 강화(講和)의 의사를

표시했다. 후금은 조선보다는 명나라를 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강화도에서도 주화론이 채택되어, 적과의 교섭을 진행시키니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퇴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후금과 강화하여도 명나라에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화약이 성립되어

후금의 군대는 철퇴하였다.

 

이 화약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패전국으로서는 최소의 부담이었으나, 후금은

전승국(戰勝國)으로서의 우월한 입장에서 강북철병(江北撤兵)의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서 금병(金兵) 1,000명, 몽골병 2,000명, 진강(鎭江)에 금병 300명,

몽골병 1,000명을 주둔시켜 모문룡을 막게 하고, 중강개시의 교섭을 하여

이곳을 개시(開市),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게 되니, 그들의 소기(所期)의 목적은

거의 달성되었다.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