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 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배경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痛感)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하였다.
경과
1620년(광해군 12년) 이서(李曙), 신경진(申景禛)이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귀·김류·김자점·최명길(崔鳴吉)과
그의 형 최내길(崔來吉)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년 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李而攽)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능양군과 이서·신경진·이귀·이괄·김류·김자점
·심기원(沈器遠)·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최명길·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문(宮門)을 열어주어 반정에 성공했다.
결과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등 광해군 때의 권세가들은 대역죄로 참형(斬刑)되었으며, 숙청되어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이후로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조식(曺植)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반면 이 반정에 공을 세워 집권한 이귀· 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等位)
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이 논공(論功)이 공평하지 못하였고, 잇단 내부 분열에 시달렸다.
반정 다음해인 1624년에 발생한 이괄의 난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역사적 의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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