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알아야

병인양요(丙寅洋擾) - 1866

yellowday 2013. 1. 28. 16:49

병인양요(丙寅洋擾[1]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

(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배경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조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

였다. 이 틈을 타서 베르뇌 주교, 리델 신부(1861년 입국) 등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전교에 힘썼으므로

1861년(철종 12년)에는 천주교인의 수가 1만8천 명, 1865년(고종 2년)에는 2만3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편 1864년(고종 1년) 러시아인들이 함경도의 경흥부에 방문해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요구에 조선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 중이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가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한다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하지만 러시아 측의 통상요구 시일이 지나면서 조선 정부는 안심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이 제안했던

삼국 동맹도 무산된다. 또한 동맹 제안에 대해 무책임한 주선으로 간주하며 선교사들을 지탄하였다. 그러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처소인 운현궁에 천주교도들이 드나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왕대비 조씨와 정부 관료들이

천주교도들의 행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단행한다.

 

1866년(고종 3년)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지면서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게되었다. .[2]남종삼·정의배(丁義培) 등

조선의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된다.[2]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2]1866년 5월 8일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는 7월 6일 청의 주푸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델이 도착했을 때 프랑스 극동함대(極東艦隊)사령관 로즈 제독톈진에 있었다. 리델은 톈진으로 직행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

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했다. [3]

 

영향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

하게 된다.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귀중도서와 은괴 19상자 등을 약탈당했다고 한다.[6]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2]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한편 유럽 열강은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조선-청나라 관계에 대하여 재검토하게 되었고,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 인사들의

한국과 동양 연구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연표

  • 1866년 - 병인양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살해한 것을 이유로, 청나라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가
  • 인천과 강화도로 쳐들어와 조선인 9,000명을 보복 살해하려 한 사건. 실패하고 철군함.
  • 1871년 - 신미양요 일본 나가사키에서 온 미해군 상륙부대. 조선이 패배함. 그러나 개항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미군이
  •  철군함.
  • 1875년 - 운요호 사건. 조선이 패배함. 일본의 개항 요구에 승복. 강화도 조약 체결.
  • 1876년 - 강화도 조약 체결. 근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 불평등 조약으로 인천, 부산, 원산의 자유무역
  • 지대를 설립함. 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과 관세면제를 인정함. 인천은 일본군의 서울 공략의 근거지가 됨.
  • 1882년 - 임오군란. 강화도 조약으로 창설된 일본식 신식군대 별기군만 우대하는 것에 대한 구식군대의 반란. 개화파
  • 고종이 물러나고, 수구파인 흥선대원군이 집권.
  • 1894년 - 동학 농민 운동 발발. 열강과의 자유무역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탈을 당하여 농촌사회가 붕괴된 것이 원인.
  • 조선 정부가 청나라 군대를 요청,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파병됨.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이 인천 자유무역지대의 일본인
  • 보호를 명목으로 파병함.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 1895년 4월 - 청일 전쟁. 일본군이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급습함. 일본이 승리. 청나라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함.
  •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명성황후가 일본에 시해됨.
  • 1896년 2월 - 아관파천. 고종이 일본을 피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망침.
  • 1902년 - 영일 동맹. 영국이 일본의 조선의 지배를 인정함.
  • 1906년 -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함.
  • 1907년 -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이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폭로함.
  • 1907년 7월 20일 -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이유로 대한제국 고종이 강제로 양위.
  • 1910년 8월 22일 - 한일 병합 조약. 대한제국 순종이 양위. 조선 멸망.                  yellowday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