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지금의 貞洞)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러시아 제국은 한자로 노서아라고도 하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진행
1895년 을미사변으로 조선 국민의 대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병(水兵) 백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친러파인 이범진 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건양 1년(1896년)에 국왕의 거처를 궁궐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1]
고종은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하였다. 이어 1895년 8월 22일에 왕후 민씨를 폐한다고 내린 조칙 등을 위조된 것으로 명하여 취소케
하였다. 이날 김홍집과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2]. 어윤중 또한 살해되었고,
유길준·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내각이 조직되었다.[1]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 제국과 가까워지며,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다. 또한 러시아 제국은 경원과 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이에 1897년 2월 18일,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 고종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평가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는 1년 동안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으며,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프(Aleckccev)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1]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의도를 봐야 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의 행동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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