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한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성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조선군의 처절한 저항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개전 1년여만에
창원 이남으로 퇴각하였으며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화(壬辰倭禍),
만력의 역(萬曆之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5]
배경 및 원인 15세기 후반 때, 서세동점에 따라 유럽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기에 노력하였으며 국내 통일에 성공한 일본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난립한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대륙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590년 일본에서 센고쿠 시대를 종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 자리를 그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내정을 맡게 하고 신분이 미천하여 쇼군이 될 수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스스로는 태합(일본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585년이며,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정벌을 준비하라고 명한 때는 이미 1587년 이었다.
또한,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은 대부분 도요토미에게 충성하던 자들이었으며, 도요토미에게 미온적이거나 비협조적이었던 다이묘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왜란 이후 도요토미 정권이 전복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들어서는 한 이유가 된다. 도요토미는 1591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통해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가도입명假道入明)"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라는 주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와의 오랜 동맹을 깨고 일거에 적으로 돌릴 수 없었고, 과거 삼포 왜란을 겪었던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선선히 조선의 길만 빌린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일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 |||
yellowday 옮김
| |||
| |||
|
'韓國史 알아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관파천(俄館播遷) - (1896' 2/11-1897' 2/20) (0) | 2013.01.26 |
---|---|
갑오경장<갑오개혁(甲午改革)> - 1894년 양력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5년 8월까지 (0) | 2013.01.26 |
기묘사화 (己卯士禍) - 1519 (0) | 2013.01.25 |
갑자사화 (甲子士禍) - 1504 (0) | 2013.01.25 |
무오사화(戊午士禍)-1498 (0) | 2013.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