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86] '묵은 때' 벗기기 전의 파르테논 조각

yellowday 2012. 11. 21. 23:20

입력 : 2012.11.20 22:42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이 자랑하는 대표적 소장품은 흔히 '엘긴 대리석(Elgin Marbles)'이라고 알려진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들이다. 1800년대 초,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엘긴 백작' 토머스 브루스(1766~1841)가 신전에서 떼어내어 영국으로 이송한 것이다.

아치볼드 아처(Archibald Archer·1791~1848)가 그린 이 그림은 영국 정부가 1816년에 엘긴 백작의 소장품을 구입하여 1832년에 영국박물관에 전용 전시실을 만들기 전까지 임시로 보관하던 방을 보여준다. 은은하게 빛나는 조각들 사이에 일반 방문객과 박물관 이사진 및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오른쪽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가 바로 아처다. 그러나 이 작품 이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아치볼드 아처 '엘긴 대리석 전시실' - 1819년, 캔버스에 유채, 94×132.7㎝, 런던 영국박물관.
이후 엘긴 대리석은 1939년에 완성된 '두벤 갤러리'로 옮겨졌다. 이는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화상(畵商)으로 손꼽히는 조지프 두벤이 엘긴 대리석을 위해 거금을 기부하여 만든 전시실이다. 두벤은 뛰어난 수완과 안목으로 몰락한 유럽 귀족들의 미술품 컬렉션을 사들여 미국의 백만장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는 그림을 팔기 전에 묵은 때를 벗겨내고 반짝이는 덧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원작이 훼손되어 종종 비난을 사기도 했다.

엘긴 대리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물관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들을 새 갤러리로 옮기면서 두벤의 뜻에 따라 그들을 뽀얗게 세척했다. 그러자 많은 이가 아처의 그림 속에서 '꿀처럼' 빛나던 대리석의 고색(古色)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사람이라면 '백옥'이든 '꿀피부'든 모두 좋겠지만 수천 년 된 조각에서 세월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낸 건 제자리에서 떼어낸 조각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