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美術산책

[85] 분열은 빨리 봉합되지 않는다

yellowday 2012. 11. 15. 06:19

 

입력 : 2012.11.13 22:44

풍성한 황금빛 밀밭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바닥에 상의를 벗어 던져두고 큰 낫을 휘두르며 추수에 열중하고 있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1836~1910)가 1865년 여름에 완성한 작품이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남자가 바로

그 해 4월에 막을 내린 남북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벗어둔 것이 북군(北軍)의 군복이기 때문이다.

윈슬로 호머 '새 밀밭의 퇴역군인' - 1865년, 캔버스에 유채, 61.3×96.8㎝,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그림 속 주인공은 당시 대부분의 군인이 그랬듯이, 평범한 농부였다가 나라 전체가 절반으로 나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4년이란 고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살아서 고향으로 되돌아온 퇴역 군인이다. 그가 사지(死地)를 헤매는 동안 버려졌던 밭에서는 놀랍게도 이토록 힘차게 밀이 자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군복을 벗어 던지고 다시 평화로운 농부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 그림을 그린 호머 또한 전쟁 중에는 잡지사의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군인들의 일상을 삽화로 남겼다. 종전(終戰) 후 몇 달 만에 이 그림을 완성한 그도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본업으로 되돌아온 '퇴역군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단지 미국의 낙관적인 미래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남자의 등 뒤로 우수수 베어져 바닥에 흩어진 밀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과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링컨은 남군이 공식으로 항복을 선언한 며칠 뒤에 암살당했다. 이처럼 전쟁은 끝났어도 분열이 빨리 봉합되지는 않고,

증오와 폭력의 기억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호머는 그림을 통해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미국인이 모두 되새겨야 할 과거의 희생과

미래의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