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숭례문 화재의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장 직에서 사임한 이후 나는 참회하는 마음에서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자제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 왔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지금, 아무래도 나의 본업은 문화유산에 대한 글쓰기에 있다는 생각에서 이제 국보 순례 길에 나서게 됐고,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당연히 숭례문이 되었다.
숭례문 화재 와중에 현판(懸板)을 구해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길이 마침내 문루(門樓)로 번지기 시작하자 한 소방관이 현판의 대못을 뽑아내고 바닥으로 떨어뜨려 내려놓음으로써 살려낸 것이었다. 당시 어떤 사람은 현판을 마구 다루었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현판의 크기는 길이 3.5m, 폭 1.5m에 무게가 자그마치 150㎏이나 되는 육중한 것으로 내려진 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데 전경이 8명이나 동원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로 옮겨 놓고 보니 숭례문 현판 글씨는 참으로 장대해 보였다. 한 획의 길이가 1m나 되는 것도 있었다. 옛날에 대동강 부벽루 현판을 쓴 평양 명필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이 대자(大字)를 쓸 때면 절굿공이만한 붓대에 큰 새끼를 동여매어 이를 어깨에 걸어 메고는 쟁기를 갈듯 큰 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썼다는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얘기가 허투가 아니었음을 알 만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60년대에 보수할 때 호분(胡粉)과 석간주(石間�{) 등 안료를 칠하면서 글자 획 끝이 뭉개져 버려서 글씨의 묘미를 상실한 것이 큰 흠이었다. 이 숭례문 현판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확실치 않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신장(申檣), 정난종(鄭蘭宗), 유진동(柳辰仝)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그런 가운데 "글씨의 장려하고 빼어남은 양녕대군의 사람됨을 상상케 한다"는 전설이 생겨 사람들은 숭례문 글씨를 더욱 좋아했고 특히 양녕대군 후손들이 크게 기리는 바가 되어 탁본을 하여 가보로 삼곤 했었다. 150년 전 양녕대군 후손인 이승보(李承輔)가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를 맡았을 때 탁본해 둔 것이 최근 서울 상도동의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서 발견되어 이번 복구 작업 때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하니 이 또한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yellowday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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