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 Korea

진분홍 꽃잔치 지난 자리, 불꽃잔치 열리는 하회마을

yellowday 2012. 9. 20. 02:00

 

입력 : 2012.09.19 22:20

굽이굽이 휘감는 낙동강 거슬러 강변 병산서원엔 선연한 배롱꽃
사람 달뜨게 하는 화려함 아니라 눈과 마음 씻는 文香과 기품…
한가위 달 아래 연꽃 같은 달걀불 절벽 불더미 떨어지면 흥취 젖어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지난여름은 혹독했다. 장마·폭염·폭우·태풍, 어느 하나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그 모진 여름에도 안동 병산서원은 꽃 물결에 잠겼다. 이 초가을 오도록 내내 진분홍 레이스를 둘렀다. 배롱나무꽃이다.

하회마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3㎞ 남짓 떨어진 강변 언덕에 병산서원이 있다.

서원 들어서는 잔디밭부터 배롱나무들이 꽃떨기를 매달았다. 서원 안 배롱나무도 꽃가지를 담 너머로 드리워 바깥 구경을 한다. 한여름 배롱꽃은 작렬하는 햇살을 못 이겨 빛바랜 것처럼 보인다. 이제 태양도 숨죽인 9월, 꽃빛은 한결 선연하다.

하지만 사람을 달뜨게 하는 화려함이 아니다. 눈과 마음을 씻어 주는 화사함이다.

배롱나무들 사이로 대문이 서 있다. 여염집 문간처럼 수수한 복례문이다. 병산서원은 안동 도산서원이나

영주 소수서원엔 비길 수도 없이 단출하다. 복례문 지나 계단 올라서면 만대루, 만대루 아래로 또 계단 오르면 입교당이다.

서애(西厓) 류성룡을 모시는 사당까지 여덟 채가 전부다. 그래도 병산서원을 최고로 치는 이가 많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꼭 있어야 할 집만 아늑하게 들어앉아 마음을 잡아끈다.

만대루엔 건물도 자연의 하나로 여겼던 조상들 생각이 담겼다. 주춧돌은 정으로 쪼아내지도 않은 듯 생긴 그대로 기둥을 받쳤다.

기둥은 휜 그대로 누각을 받쳤다. 대들보는 낙동강처럼 구불구불한 채로 지붕을 받쳤다. 계단은 커다란 통나무 한 덩어리를 투박하게 잘라내 걸쳤다.

만대루(晩對樓)라는 이름은 두보 시 '백제성루(白帝城樓)' 한 구절 '푸른 병풍처럼 둘러친 산수를 늦을 녘 마주할 만하다(翠屛�Z晩對)'에서 따 왔다.

 만대루에 오르면 솔숲 너머 너른 백사장이 펼쳐진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엔 짙푸른 병산(屛山)이 병풍(屛風) 치듯 서 있다.

가깝고 먼 풍경이 해 질 녘 한 폭 수묵화로 어우러진다. 시간이 멈춰선 것 같은 풍경이다. 아쉽게도 만대루는 2년 전부터 올라가지 못한다.

단체 방문객이 많아지면서 누각이 버텨내지 못할까 염려해서다. 난간 위까지 솟아오른 배롱꽃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는 수밖에 없다.

유생을 가르쳤던 입교당 뒤, 서애 부자 위패를 모신 존덕사 앞엔 400살 가까운 8m 배롱 거목이 꽃 구름을 피워 올렸다.

340년 전 서애가 이곳으로 서당을 옮겨오기 전부터 낙동강변을 지키고 있다. 병산서원 배롱꽃은 담양 명옥헌 것보다는 성기다.

명옥헌 배롱 숲은 워낙 울창해서 정자를 숨기다시피 한다. 늦여름 절정엔 진분홍꽃이 아찔하게 흐드러진다.

그에 비해 병산서원 배롱꽃은 서원의 문향(文香)과 정취를 곁에서 돋워 준다. 선비 혼(魂)처럼 기품 있다.

배롱나무는 흔히 '나무 백일홍'이라고 부른다. 백일홍처럼 꽃이 석 달 열흘을 가기 때문이다. '열흘 가는 꽃 없다(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는 말이 무색하다.

하지만 한 꽃이 오래 피는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피고 진다. 계절까지 넘나들며 서원과 정자와 절 마당을 걷고 싶은 곳으로 꾸며 준다.

병산서원 배롱꽃도 이제 끝물이다. 엊그제 태풍에 그나마 남아 있다는 게 신통하다.

게다가 병산서원은 앞으로 한 달 문화재 실측을 하느라 철제 비계(飛階) 투성이다. 당분간 고즈넉한 산책은 어렵겠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그래도 하회마을 낙동강변엔 꽃잔치 하나가 남았다. '선유(船遊) 줄불놀이'라는 불꽃잔치다. 하회 사람들은 마을을 감고 가는 낙동강 상류를

 '꽃내', 화천(花川)이라고 불렀다. 마을 뒷산은 화산(花山)이고 마을 앞 강 건너 절벽은 연꽃을 뜻하는 부용대(芙蓉臺)다.

옛 하회 선비들은 음력 7월 열엿샛날 밤 화천과 부용대에서 뱃놀이와 불꽃놀이를 즐겼다.

줄불놀이는 그날 오후 병산서원 앞 강물에 달걀 껍데기나 잘게 쪼갠 바가지 몇백 개를 띄워 시작한다.

거기에 들기름이나 피마자기름 먹인 솜덩이를 얹어 불을 붙인다. 이 '달걀불'이 강물에 떠 가 어둑해질 무렵 하회마을 앞에 다다른다.

부용대와 마을 강변 만송정 솔숲 사이 공중엔 긴 새끼줄 네댓 개를 왕복으로 걸어놓는다.

그 줄에 뽕나무 뿌리를 태운 숯가루와 마른 쑥으로 삼은 심지를 한지 봉투에 담아 줄줄이 매단다.

달걀불이 환히 핀 연꽃처럼 점점이 부용대 앞까지 떠내려 오고 둥근달이 떠오른다. 때맞춰 봉투 심지에 불을 붙여 부용대 쪽에서 천천히 줄을 당겨 올린다.

부용대 위에선 소나무 무더기 '솟갑단'에 불을 질러 떨어뜨린다. 허공엔 타닥타닥 불꽃 튀기는 '줄불'이 떠 가고, 절벽에선 불더미가

'낙화(落火)'하고, 선비들은 배 띄워 술잔 돌리며 시창(詩唱)을 읊는다.

이 신명나는 장관은 조선 말 맥이 끊겼다가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되살아났다. 축제 중 두 토요일 밤에 벌어진다.

올해는 9월 29일 추석 전야와 10월 6일이다. 서양 불꽃놀이하고는 차원이 다른 '하회 스타일' 불꽃잔치가 한가위를 더욱 흥겹게 해 줄 것이다.

하회마을은 들여다볼수록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