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7.15 22:33
건축가 김수근(1931~1986) 하면 많은 사람이 '로맨티시스트'라는 말을 떠올린다. 작고한 지 26년이 흐른 지금도 김수근이 얼마나 통 크고 멋지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전설 같은 얘기들이 많다. 한번은 그가 창간한 잡지 '공간' 직원들이 설악산에 야유회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사정을 들은 김수근의 대답은 간단했다. "가서 지프 팔아 와." 그는 자기 발이나 다름없던 지프를 처분해 직원 야유회 비용에 보탰다.
▶김수근은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59년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에 당선돼 귀국했다. 나중에 그는 5·16 세력과 뜻이 맞아 대형 국토개발 프로젝트를 도맡았다. 경부고속도로 기본계획, 포항제철 입지 선정 같은 것들이었다. 1966년 어느 날 김수근이 100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흔들고 사무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JP에게 격려비로 받았어. 무조건 쓰라는 거야. 어떡하지?" 당시 200만원은 집을 몇 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건축 전문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건축가'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건축 관련 광고는 꿈도 꾸지 못했고 필진도 구하기 힘들었다. 건축 잡지를 월간으로 발행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수근의 소신은 확고했다. "한국에도 '건축'이 있었다는 걸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듯 건축물에도 건축가의 생명과 철학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공간'은 적자였다. 그러나 김수근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해 그가 미국의 명문대 도서관에 갔더니 서가에 '공간'이 죽 꽂혀 있었다. 책갈피마다 학생들의 손때가 묻어 있고 메모 쪽지도 끼워져 있는 걸 보고 돌아와 김수근이 말했다. "죽어도 '공간'만은 내야겠어." 출발은 건축이었지만 '공간'은 곧 미술·음악·무용·연극에도 문을 열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처음 국내에 소개했고 병신춤의 공옥진을 비롯해 햇빛 못 보던 전통 예능 장인들을 세상에 알렸다.
▶김수근은 내로라하는 함경도 부잣집에서 태어나 잘나가는 건축가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떴을 때 남은 재산은 거의 없었다. 창간 46년, 이달로 536호를 낸 '공간'의 운영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린다. 돌아보면 '공간'이 어렵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공간'이 앞장서 건축을 보는 눈높이를 올려준 덕에 건축과 우리네 생활은 전에 없이 가까워졌다. 이젠 서점에도 건축 관련 책이 흔하다. 그런 마당에 정작 그 씨앗을 뿌린 잡지를 우리가 잘 키워가지 못한다면 지하의 김수근에게 죄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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