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반바지 市의원

yellowday 2012. 7. 10. 08:32

입력 : 2012.07.09 22:26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1964년 의원에 당선돼 등원하자 그리스 의사당이 술렁였다. 그가 양복에 받쳐 입은 건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아니라 목이 긴 터틀넥 스웨터였다. '의회 모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스웨터를 계속 입었다. 터틀넥 패션은 대중 정치가 파판드레우의 출발점이자 그가 누린 인기의 상징이 됐다. 그는 81년 그리스 최초 좌파 정권을 출범시킨 이래 연임 합쳐 세 차례 총리를 지내며 복지 정책을 무한정 쏟아냈다.

▶2003년 일본 이와테현 의원이 된 프로레슬러 '그레이트 사스케'는 복면을 한 채 의회로 들어왔다. 그는 "복면을 벗는 순간 내 정체성이 사라진다"며 버텼다. 그에게 "권위주의를 통쾌하게 깼다"는 격려 편지와 이메일이 밀려들었다. 그는 프로레슬링에서 은퇴하고 의원을 그만둔 뒤로도 복면을 쓰고 다녔다. 사스케는 2009년 지하철에서 복면한 자기를 휴대전화로 찍는 남자를 집어 던졌다가 수갑을 찼다.

▶TPO(Time·Place·Occasion)는 시간·장소·상황에 맞춘 옷차림을 이른다. 자유롭고 개성 있게 입는 것도 좋지만 사적(私的) 공간과 공적(公的) 장소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2005년 1월 폴란드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60년 기념식에 유럽 정상들은 어두운 정장에 코트를 입고 왔다. 체니 미국 부통령만 스키 파카에 털모자, 등산 부츠로 몸을 감쌌다. 워싱턴포스트는 체니의 방한 차림에서 미국식 실용주의가 얼마나 경박한지 드러났다고 혀를 찼다.

미국 하원은 지난 3월 모자 달린 티셔츠를 입고 연단에 선 의원을 회의장 밖으로 쫓아냈다. 모자를 금지한 '드레스 코드'에 따른 조치였다. 우리 국회엔 복장 규정이 따로 없다. 2003년 흰 바지와 면 티를 입고 등원한 유시민 의원을 비롯해 옷차림 논란이 심심찮게 이어져온다. 지난 주말엔 서울시의회 초선 의원이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채 본회의 시정연설에 나섰다. "서울시가 여름철 시원한 복장을 하자는 데 찬성하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스 현대 정치의 거목 파판드레우는 이제 나라 거덜낸 장본인이 됐다. 그가 시작한 퍼주기 복지가 빚으로 쌓이면서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로 굴러떨어졌다. 아들 게오르기오스는 아버지의 오래전 '공짜 점심' 계산서를 받아들고 작년 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포퓰리스트' 파판드레우의 사후(死後) 몰락은 48년 전 터틀넥 스웨터에서 예고됐던 것인지도 모른다. 옷은 언행만큼이나 사람의 됨됨이를 잘 말해준다. 의원이 의회에서 하는 몸가짐은 국민 앞에서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바지 차림 시의원을 보며 서울 시민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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