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日報 萬物相

이성계 御眞(어진)

yellowday 2012. 4. 27. 15:15

입력 : 2012.04.26 22:43

의학계 원로인 이성낙 가천의대 명예총장은 일흔 넘어 명지대 미술사 박사과정에 들어가 조선 초상화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 옛 초상화는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 얼굴만 보고도 그 사람이 겪었을 갖가지 질병, 심지어 사인(死因)까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영조 때 대사헌을 지낸 송창명의 초상화에서 피부 멜라닌 색소가 줄어들어 생기는 백반증 흔적을 찾아냈다.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오명항의 초상화에선 유난히 검게 칠한 얼굴을 보고 간암 말기 증상을 읽었다.

▶조선 초상화의 무서운 사실 추구 정신은 지엄하신 임금을 그린 어진(御眞)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기록들을 보면 태조 이성계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큰 귀가 특이했다고 한다. 전주 경기전에 모셔놓은 이성계 어진이 딱 그 모습이다. 그림 속 이성계는 큰 몸집에 양쪽 귀가 유난스럽다 할 정도로 크다. 오른쪽 눈썹 위에는 지름 0.7~0.8㎝ 크기 사마귀가 그려져 있다.


▶조선 초 그렸던 이성계 어진이 낡고 빛 바래자 고종 때인 1872년 옮겨 그린 것이 경기전 어진이다. 조선 왕실 최고 어른의 이마에 난 사마귀는 흠으로 비칠 수 있다. 그걸 곧이곧대로 그리는 것은 이성계나 그 후손인 왕들에게 무엄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털끝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고 믿은 조선 초 화가의 붓끝에서 태조 이성계의 사마귀도 벗어나지 못했다. 500년 뒤 후배들 역시 그 정신에 따라 선배 그림을 옮기면서 국조(國祖) 얼굴에 사마귀를 남겨놓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 철저했던 것은 초상화를 미술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물 자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진을 그릴 때는 당대 최고 화가들이 보통 6~7명, 많게는 13명까지 참여했다. 화가들은 화폭에 임금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부터는 작업실을 들고날 때마다 그림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외적이 쳐들어와 피란을 가면 국왕과 관리들은 함께 피란 온 선대(先代)의 어진을 앞에 두고 통곡하기도 했다. 어진을 모신 전각에 불이 나면 왕이 소복을 하고 사흘간 곡을 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이 보물 931호 이성계 어진을 국보로 승격시키기로 했다. 26점이나 되던 이성계 어진 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한 점이다. 전해오는 조선 왕들의 공식 어진 중에서도 완전하게 남은 유일한 전신상이어서 더욱 소중하다. 거짓과 왜곡이 판치고 번지르르한 포장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 사실을 생명처럼 여겼던 조선시대 초상화 정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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