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2.07 23:18 | 수정 : 2012.02.09 08:09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까마득히 먼 윈난성(雲南省), 그중에서도 오지인 샹그릴라에서 만난 40대 여성 공산당 간부가 "한국 여자들이 부럽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피부가 고와서"라고 했다. 티베트 고원 중턱에 사는 샹그릴라 사람들은 햇볕과 바람에 노출돼 살갗이 거칠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한류 팬이었다. 그 즈음엔 '대장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한국에 갔다가 비싼 한국 화장품을 사왔다"고 자랑했다.
▶중국에서 한류 팬을 가리키는 '하한쭈(哈韓族)'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1990년대 후반이다.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같은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면서였다. 1980년대 일본에선 홍콩 영화의 유행을 '항류(港流)'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대만 대중문화 붐을 가리키는 '대류(臺流)', 중국 문화의 인기를 일컫는 '화류(華流)'라는 말도 있다. 한류는 이들과 경쟁하며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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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우리 국민소득은 87달러, 수출액은 5481만달러였다. 그 해 열일곱 살 소녀 가수 윤복희가 '코리안 키튼즈'라는 걸그룹을 만들어 동남아 공연에 나선 게 한류의 시초쯤일 것 같다. 궁핍하던 그 시절을 윤복희는 이렇게 돌아봤다. "나는 무대가 아니면 길거리에 내던져져 있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밤엔 명동 시공관 분장실에서 자거나 길거리 교회 지하실에서 자기도 했습니다."(윤복희 자서전 '저예요, 주님')
▶지난해 한국의 영화·TV·음반 수출액이 7억9400만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문화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은 1997년 500만달러 첫 수출을 올릴 때까지 한 푼도 없었다. 14년 만에 160배 성장한 셈이다. 한류가 넓게 퍼지면서 관광객이 급증하고 패션·미용 같은 관련 산업까지 덕을 보는 것을 감안하면 한류의 효과는 드러난 액수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한때 "한국 반도체·여자골프·바둑이 세계 일등이 된 것은 정부 안에 그 분야들을 담당하는 과(課)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우스개가 있었다. 정부가 섣불리 '지원' 운운하며 간섭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놔두는 게 저마다 자생적인 경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지금 한류에 대해서도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