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2.02 23:08
"이 나라는 오랫동안 잠자다 이제 극단적 보수주의에서 깨어났다. 교회는 후퇴 없이 성장하고 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평양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새뮤얼 A 마핏(마포삼열·馬布三悅)은 본부에 그렇게 보고했다. 1893년 평양 서문 밖 초가에서 선교가 시작된 지 5년 만에 평안도·황해도 장로교 신도는 5950명으로 전국 장로교인 7500명의 80%를 차지했다. 장로교뿐 아니라 1938년 전국 기독교인 60만명 중에서도 서북 지역 신도가 75%나 됐다.
▶서북이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 이유로 새로운 것에 개방적인 서북인의 진취성을 든다. 다음에 꼽히는 것이 조선왕조의 뿌리 깊은 서북 푸대접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000명 가운데 평안도 정주 출신은 277명을 차지했다. 전국 통틀어 서울 다음 가는 2위로, 유림의 본고장 안동보다도 많은 급제자를 냈다. 그러나 서북 출신은 승진이 3품, 4품, 그것도 한직(閑職)에 그치고 핵심 고위 관료로 올라서지 못했다. 자연히 서북인들은 반(反)봉건 의식을 키우며 유교 이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을 그리게 됐다.
▶서북 지방 교회는 '최초'의 훈장을 단 곳이 많다. 마핏 목사가 세운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한국 최초 신학교다. 그가 세운 평양 장대현교회에선 새벽 기도회가 처음 시작됐다.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인 길선주 목사는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다. 그는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역사적인 '평양 대부흥회'를 이끌었다. 평양 남산현교회에서는 체계적인 주일학교가 시작됐다.
▶광복 후 공산 세력이 들어서자 교회는 먼저 탄압 대상이 됐다. 김일성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하다 희생된 조만식 선생은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였다. 교회 신자 중엔 어린이도 많았다. 공산당은 주일날 소풍이나 과외활동을 시키거나 교회 다니는 아이는 반장을 못 하게 하는 유치한 방해도 서슴지 않았다.
▶재외 동포와 대북 교류 사업을 벌여온 우리민족교류협회가 사라져버린 북한의 초기 교회 모습을 재현한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었다. 달력을 받아 본 실향민들이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북한 공산 정권을 피해 월남한 실향민 중에는 기독교 신자가 특히 많다. 워낙 신앙이 생활화됐던 지역이니 어릴 적 다녔던 교회가 어머니 품같이 그립기도 할 것이다. 고향에 달려가고픈 이들의 꿈은 언제 이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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