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향토사학자 송경록은 2000년 서울에서 발간한 '개성(開城) 이야기'에서 "개성 사람들은 지금도 다른 지방에 갈 때면 '내려간다'는 표현을 쓴다"고 했다. 자기네가 세상 중심, 맨 꼭대기에 있었다는 자존심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19세기 인구가 한창 많을 때 20만명이었다. 이보다 몇 백년 전 고려 개성은 인구가 70만명에 이른 국제도시였다. 고래등 같은 기와지붕이 처마를 이었고 멀리 동남아·아라비아에서 온 장사치까지 거리에서 목청을 높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개성을 푸대접하면서 개성 사람들은 관직보다 상업에서 활로를 찾았다. 개성 남정네들은 장사 보따리 짊어지고 전국을 떠돌다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돌아왔다. 그들은 잃어버린 영화(榮華)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듯, 돈을 모으면 집을 장만하고 단장하는 데 썼다.
▶개성 한옥들은 6·25 전쟁 와중에도 용케 많이 살아남았다. 특히 자남산 언저리 300m 넘게 이어진 한옥거리는 서울·평양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고도(古都) 개성의 예스러운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다. 독일 건축가 레셀은 이곳을 돌아보고 "권세와 명예를 좇지 않았던 서경덕 선생의 기침소리가 금방이라도 문 밖으로 울려나올 듯하다"고 했다.
▶경기도가 개성에 남아 있는 300여 채의 한옥을 보존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3.3㎡ 한 평에 많게는 1000만원이 들어가는 사업이다. 흔히 한옥을 "조상들 삶의 지혜가 담긴 생활문화재"라고 하지만 한옥마을은 급속한 근대화를 거치면서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 대로 사라졌다. 개성에 한옥들이 남아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북한이 그만큼 덜 개발된 덕분일 것이다. 남북이 문화유산을 보존하자는 뜻만이라도 공감한다면 우리도 중국 윈난성 리장(麗江)처럼 옛 향기 넘치는 마을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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