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난성의 대표적인 명소로, 청암산(青巖山)이라고도 부른다. 1982년 중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국가삼림공원으로 톈쯔산[天子山], 삭계욕자연보호구(索溪峪自然保護區)가 하나로 연결되어 우링위안[武陵源]풍경구를 이룬다. 특히, 독특한 석영사암의 봉우리들로 유명하며, 다양한 야생 동 · 식물이 서식한다. 황사채(黃獅寨), 금편계곡(金鞭溪), 요자채(腰子寨), 사도구(沙刀溝), 비파계곡(琵琶溪) 등 다섯 곳의 명소가 있다. 1992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장량(張良)이 은거한 장가계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고 한나라 때의 개국공신이자 군사가이다. 장량의 생졸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의 안휘(安徽) 호현(毫縣) 동남 지역의 사람으로 조부와 부친이 대를 이어 한나라 소후와 선혜왕의 오대(五代)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한나라의 회복을 도모하며 자객들과 교류를 맺고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秦始皇)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하비(下邳) 로 도망치게 되었는데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난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얻었다고 한다. 진나라 말기 농민전쟁 중에 무리를 모아 유방에게 나아가 중요한 책사가 되었다. 초한(楚漢)의 전쟁기간 동안 "6국의 후대를 세우지 말 것, 영포(英布), 팽월(彭越)과 연합할 것, 한신(韓信)을 중용할 것" 등의 계책을 내놓았으며 또한 남쪽의 항우(項羽)를 정벌할 것과 초군을 섬멸할 것을 주장하여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한 왕조를 건립하는 데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한 왕조의 건립 후 유방은 그를 유후로 봉했다.
장량이 어떻게 죽었는지, 사후에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해(辭海)』에는 "장량과 황석을 함께 합장시켰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지점은 말하지 않았다. 당대 사람 소덕언(蕭德言)은 『괄지지(括地志)』에서 "장량의 무덤은 서주(徐州) 패현(沛縣) 동쪽 65리에 있고, 유성(留城)과 가깝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황석총을 장량분(張良墳)으로 착각한 것으로서 『사기(史記)』와 『전한서(前漢書)』만 대조해 봐도 그 잘못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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