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1.29 14:31
“동이 틀 때면 횃대에 올라가 울면서 어둠이 끝나고 새날이 온다고 선언하는 닭은 광명의 상징입니다. 옛사람들은 닭이 밤새도록 활개 치던 귀신들을 쫓는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그린 닭들이 국가적으로도 벽사(辟邪)의 의미가 되기를 바랍니다.”
닭은 문, 무, 용, 의, 신을 갖춘 덕금(德禽)
전 국민의 좌절과 분노, 허탈감을 뒤로한 채 2016년이 막을 내리고, 닭의 해인 2017년 정유년(丁酉年) 새날이 밝았다. 2017년 1월 4일부터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갤러리에서 닭을 주제로 개인전을 여는 민화작가 서공임을 서울시 효자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가슴을 쫙 펴고 붉은 볏을 쳐든 채 힘차게 꼬리털을 뻗고 있는 그의 그림 속 닭들은 웬만한 위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힘찬 위용을 보여준다. 닭의 볏은 머리에 쓰는 관처럼 보여 관직을 상징한다. 볏은 문(文), 날카로운 발톱은 무(武)를 상징하고, 적을 보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용(勇), 먹을 게 있으면 서로 부르는 의(義), 때를 놓치지 않고 우는 신(信) 등 다섯 가지 덕을 고루 갖췄다고 해서 닭은 덕금(德禽)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닭 그림에는 부귀영화와 무병장수, 가족의 행복을 상징하는 모란과 국화, 맨드라미, 병아리들도 함께 등장한다. 모든 사람의 염원이다.
서공임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세부터 40여 년간 줄곧 민화를 그려왔다. 미대를 졸업한 화가들은 ‘베끼는 그림’이라면서 민화를 그림으로 취급하지 않던 때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고, 이제 민화의 위상은 달라졌다. 한국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세계 각국에서 각광받고 있을 뿐 아니라 민화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급증하고 있다. 그는 현재 연세대 미래교육원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민화를 가르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서공임 작가의 염원은 “그림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였다.
“전북 김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우리 집은 복숭아를 키우는 조그만 과수원을 하면서 특용작물도 재배했죠. 복숭아꽃이 피는 봄이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드는 예쁜 마을이었어요. 1시간씩 걸어서 학교에 갔는데, 가는 길에 평야와 연못, 보리밭, 뱀과 들꽃 등 온갖 것들을 다 만났죠. 연못의 연잎을 뜯어 우산 대신 쓰고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친구들 방학 숙제는 제가 다 해줬어요.”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는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농사만으로 생계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부모님은 과수원을 팔고 도시생활을 시작했다.
“삭막한 환경이었지만 남한산성에 그림 그리러 다니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국전을 개최한다는 뉴스를 보면 덕수궁 전시장까지 찾아갔습니다. 없는 돈에 팸플릿까지 사 와서는 계속 들춰보면서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죠.”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물감 사러 간 가게에서 ‘그림 그릴 직원을 모집한다’는 벽보를 보고 찾아간 곳이 민화를 그리는 상업적인 화실이었다. 그곳에서 2~3년 민화를 그리고 있을 때 지방 방송국에 다니던 이종사촌 오빠가 ‘제대로 배워보라’면서 전통산수화를 그리는 작가를 소개해줬다.
“그 선생님은 제가 민화를 그린다니까 ‘양다리 걸칠 생각은 말아라. 세필을 버리고 와라’고 하셨어요. 그 후 2~3일 동안 산수화를 배울지 민화를 계속 그릴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제가 민화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어릴 적 혼례나 회갑연 같은 마을 잔치에 가면 차일을 치고 병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병풍 속 그림이 민화였습니다. 벽장의 문에도 민화가 그려져 있었고요. 그때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민화를 그리되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교과서 역할을 했던 중국의 《개자원화보(芥子園畫譜)》를 구해 매일 퇴근 후 연습을 거듭했다.
“성남에 있던 화실이 인사동으로 옮긴 후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어요. 화랑과 골동품 가게, 붓 가게, 종이 가게, 가구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인사동을 누비며 현대적인 그림과 옛 그림, 옛 물건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죠. 항상 뛰어다녀서 인사동에서 그 유명한 ‘미스 서’였어요. 인사동에서 성남의 집에까지 가려면 청계천 5가에서 버스를 타야 했어요.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헌책방에 들어가 민화 관련 책이나 자료를 구하기도 했죠.”
7년 만인 1985년, 그는 인사동에 조그만 화실을 마련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성실하다는 평을 얻었기에 하나둘 일을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저 일을 맡겨주는 게 고마워 민화든 탱화든 주문받는 대로 그렸다고 한다.
“건설경기가 좋을 때는 그림이 잘 팔렸어요. 아파트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집에 걸어둘 그림을 찾고, 바이어에게 줄 선물용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도 많았죠. 인사동 다방에 들어가면 전국적으로 그림을 유통하는 중개상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주문 날짜에 맞추느라 이틀에 한 번 밤을 새우며 그린 적도 있어요. 살갗이 닳아 피가 나도 모를 정도였어요. 10년 동안 열심히 그리면서 돈을 모아 1996년 백상기념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까지 모시면서 생계를 해결하느라 미대에 진학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어디 나왔어요?’라고 묻고, 민화라고 하면 ‘베끼는 그림이구나’라고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를 볼 때마다 ‘그림 그리는 장사꾼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나도 성장하고 싶다. 전시장에 내 그림을 걸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고 말한다. 대규모 민화 전시를 한 작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세계인에게 민화의 정신과 아름다움 전파
“민화를 멋지고 품위 있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유명 광고회사에 의뢰해 카탈로그를 공들여 제작한 뒤 언론사마다 다니면서 전시 소개를 부탁했어요. 그러자 언론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그림도 모두 팔렸어요. 전시회 첫날 아침, 검은색 세단에서 내린 분이 전시장을 둘러보더니 호텔에서 필요하다면서 병풍 몇 점을 바로 구매했습니다. 꿈 같은 일이었죠.”
그해 10월에는 인사동에서 스페인 국왕 부부를 만났다.
“원래 제 작업실을 방문한다고 했지만 너무 허름한 건물이어선지 계획이 변경돼 인사동 전통음식점에서 만났습니다. 제 작품을 들고 가서 보여드리고 작은 그림을 선물했습니다.”
1998년에는 무인년(戊寅年) 호랑이해를 맞아 호랑이 그림을 전시했다.
“호랑이는 벽사의 의미가 가장 강해 정초에 임금이 세화(歲畫)로 선물하던 그림이었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액운을 막고 오복을 불러들이기 위해 대청마루 위나 대문에 붙여 놓았죠. 호랑이 그림에는 한국인의 얼굴처럼 슬프고 행복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이 모두 있어요. 민화 속 호랑이는 맹수라기보다 편안하고 친근한 모습입니다. 저도 호랑이에 특히 매력을 느껴 여러 번 호랑이 그림 전시를 했습니다.”
첫 개인전 이후 해마다 전시가 이어졌다. 그는 민화뿐 아니라 자수, 나전철기, 부도의 문양 등 전통을 폭넓게 연구하고 이를 현대인의 생활에 접목하는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전통에 바탕을 두되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현대인의 미감에 맞춰 강렬한 원색으로 바탕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의 민화는 의상과 그릇, 호텔 인테리어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다. 민화의 현대화, 대중화에 앞장서온 셈이다. 2010년부터는 중국, 프랑스, 폴란드, 아르헨티나, 헝가리, 독일, 스페인 한국문화원에서 전시하면서 세계인에게 민화를 소개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청와대는 그의 〈일월오봉도〉를 선물하기도 했다. 2017년 2월에는 이탈리아 로마, 3월에는 피렌체 전시가 계획되어 있다.
“2016년 10월에 개원한 로마의 한국문화원이 제 그림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아예 선물하겠다고 하면서 문화원 벽면에 맞춰 모란꽃과 책거리 그림 네 점을 새로 그려서 기증했죠. 저도 곧 예순이 되는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죠.”
11년 전 인사동에서 효자동으로 작업실을 옮긴 후 그는 “마음이 많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화원과 장인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예요. 〈인왕제색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겸재 정선의 집터도 있습니다.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을 산책하면서 ‘그들 그림이 편안하고 깊이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조선시대 무명 화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을까?’를 느껴보려고 합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그림도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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