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수십만개 레고 조각… 진기한 山水를 이루다

yellowday 2017. 3. 14. 07:49

입력 : 2017.03.14 03:02

[제29회 이중섭미술賞 황인기]

인왕제색도·몽유도원도 등 재해석한 '디지털 산수화'로 이름
못·레고·수정 일일이 박고 붙여 산수화 위엄과 서정 재현

"인류가 이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 수천년동안 진화하고 문명화됐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옛날 사람들보다 수십 배 행복해야 마땅한데, 실제 그런가 의문이 들어요. 그게 내가 두고두고 생각하는 작품의 모티브입니다."

충북 옥천 읍내에서 자동차로 20여분 들어가는 산골에서 황인기(66)는 은자(隱者)처럼 살고 있었다. 성균관대를 정년퇴임하기 훨씬 이전인 1996년 시작한 산중생활이다. 미술협회 회원도 아니고, 이렇다 할 그룹에 들어간 적도 없다. 교수 시절에도 강의는 하루에 몰아서 한 뒤 당일 저녁 옥천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누가 내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도 아닌데, 대도시에 흐르는 전투적인 긴장감이 싫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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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기 화백이 옥천 석탄리 작업실에서 활짝 웃었다. 그는“이중섭미술상은 서양 콤플렉스에서 멀리 벗어난 분들에게 주어졌다. 그 대열에 서게 돼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뒤에 걸린 작품은 가로 3m7㎝, 세로 6m91㎝에 달하는‘오래된 바람’2011년 작.‘ 레고 산수화’로 불리는 이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홍희는“레고 블록의 체계적 구조와 광택, 컬러까지 활용한 레고 산수의 정수”라고 호평했다. /신현종 기자
'디지털 산수화'는 황인기란 이름 석 자와 동의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이따금 고라니 내려오는 이 심심산골에서 싹 틔우고 만개(滿開)했다. '인왕제색도', '몽유도원도' 등 전통산수화를 재해석한 작품들은 국내외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회화의 재료가 붓과 물감이 아니라 리벳(못), 레고 조각, 인조 수정, 실리콘이란 사실이 대반전을 일궜다. 6m 넓이 대형 보드에 컴퓨터로 밑그림을 만든 뒤 수십만 개 레고 조각 혹은 인조수정을 일일이 박고 붙이는 방식으로 산수화의 위엄과 서정을 재현한 작품은 그 공정만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왜 산수화였을까? "서양인들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으로 행복을 찾으려 했다면 동양인들은 이를 절제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했지요. 덜 벌고 덜 먹고 사는 게 행복이 아닐까. 그 마음으로 그린 산수화가 그때와 지금을 하나로 연결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사람들과 '얼~쑤' 하면서 같이 춤추는 느낌이랄까."

황인기 약력
충주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살았다. 가업이 망해 서울로 쫓겨 올라오면서 "생각 많은" 아이가 됐다고 했다. "아주 부유하게도, 아주 형편없게도 살아보면서 돈이라는 게 내 주머니에서 영원히 머무는 게 아니구나 깨달았죠." 서울대 공대 입학한 지 1년도 안 돼 미대로 다시 시험을 쳐 들어간 것도 그 허무함 때문이다. "공대를 간 게 단지 취직이 잘돼서였는데 돈을 많이 벌면 내가 과연 행복해질까 의문이 들었어요."

화가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은 뉴욕 시절 굳어졌다. "세계의 미술 사조가 만나고 부딪치는 뉴욕이 내 삶에 큰 원동력이 된 건 사실이에요. 한데 아무리 봐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그림처럼 내 안에 뿌리내린 동양적 감성이 그곳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더군요.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생각, 그러니 서양문화에 녹아들 이유가 없고 그들을 뒤쫓아갈 일도 아니라는 결론!"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공을 접목시킨 디지털 산수화는 이런 결벽과 외골수 기질에서 탄생했다. 200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는 조선 중기 문신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를 50배 확장한 밑그림에 거울 조각 13만 개, 실리콘 점 6만 개로 구성한 28m의 벽화 '바람처럼'을 설치해 관객을 압도했다. 2004년 작 '훈풍이 건듯 불어'는 조선 말 이자장의 불화 '18나한도'를 144배 확대해 70만 개 붉은 실리콘 점으로 마감한 뒤 지하철 광고사진으로 연출한 일종의 팝아트다. 최근엔 서양 명화, 보도사진, 광고사진을 소재로 '비틀기'의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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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레고 조각을 박아 산수화를 ‘그리고’ 있는 황인기 화백. 회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신현종 기자
요즘 그가 가장 경멸하는 건 미술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 락한 세태다. "꽃을 잘 그리는 어느 작가는 장미 한 송이 그림은 1년에 몇 점, 열 송이는 1년에 몇 점 하는 식으로 딜러들과 계약한다더군요. 제프 쿤스가 아닌 이상 나 또한 그 라인에 들어가면 크리스털 몇 점, 레고 몇 점 하는 식으로 계약하겠지요. 예술이 살아남기는 할까요?" 그림을 왜 그리느냐는 질문엔 심드렁히 반문했다. "당신은 왜 밥을 먹나요?"  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