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예순인 한 중년의 여성. 그는 어느 목사의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결혼은 마흔 가까이 돼서 했다. 이듬해 늦둥이 딸을 얻었다. 딸은 대학생이 됐다. 남편과는 2년 전 이혼했다. 이 중년 여성의 이름은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이다. 나열한 조건만 보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 중 하나. 그런 그가 최근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평범한 여성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언니 동생 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특정한 직함이 없고 명함도 없다. 그런 ‘일반인’인 그가 대통령과 가깝게 지낸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다. 비선(秘線)실세. 말하자면 ‘조직도’에 없는 사람이지만 사실상 입김은 가장 세다는 의미다. 그게 문제가 됐다.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다. 몇 가지 의혹만 제기됐을 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들과 함께.
1 청담동 더블루케이 2 정유라 인터뷰 화면 캡처(유튜브) 3 미르재단 전경 |
의혹 1 | 대통령과의 친분
발단을 짚자면 시계를 많이 돌려야 한다. 1975년. 최순실과 대통령의 인연이 처음 시작한 때다. 최순실은 대통령의 ‘멘토’
역할을 하던 최태민 목사의 딸이다. 최태민 목사는 육영수 여사 사망 이후 “꿈속에서 육 여사가 대통령을 도와주라고
했다”면서 적극 보좌에 나섰다고 전해지며, 70년대엔 대통령과 새마음봉사단을, 80년대엔 육영재단을 함께 운영했다.
대통령보다 네 살 아래인 최순실은 이때부터 자연스레 대통령과 가까워졌다. 둘은 40년간 고락을 함께했다. 10.26 후 상심에 빠진
대통령 곁을 지킨 것도, 2006년 서울시장 선거유세 현장에서 괴한에게 피습당한 대통령을 간호했던 것도 최순실이었다고 한다.
1998년 대통령이 정계에 등장했을 때 보좌관은 정윤회가 했다. 당시 정 씨는 최 씨의 남편이었다. 미혼에다, 한때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을 벌이며 형제지간 사이가 멀어진 박 대통령에게는 최순실이 혈육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의혹 2 |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특정 인물이 지목되자 점차 구체적인 의혹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두 개의 재단이
설립됐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이다. 이 두 재단이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의 ‘돈줄’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겉으로 보면 두 재단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화진흥과 스포츠진흥을 목적으로 한 건전한 민간단체 같다.
겉으로 보면 두 재단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화진흥과 스포츠진흥을 목적으로 한 건전한 민간단체 같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은 스케일이 너무 크다. 출연금만 800억원에 달한다. 모두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으로부터 받았다. 설립과정도 초스피드였다. 통상 재단 설립에는 2~4주가 걸린다. 그런데 이 두 재단은 단 하루 만에 허가가 났다. 심지어 허가 전에 설립 현판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당시 문체부는 담당자를 굳이 서울로 출장 보내면서까지 두 재단의 설립을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이유다.
의혹을 증폭시킨 대목은 또 있다. 출연재산 774억원 중 620억원을 운영재산으로 분류한 것이다. 한 기금 관계자는 “이렇게 하면 재단이 설립 목적으로 밝힌 ‘문화·스포츠진흥’과 관련 없이 사용하기 용이하다”면서 “행정기관의 관리감독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최순실이 두 재단을 사유화하려 했다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그가 직접 소유하거나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알려진 개인 회사들의 존재가 드러나면서다. 올해 폐업한 한국의 ‘더블루케이(The Blue K)’가 그중 하나로, 더블루케이는 K스포츠재단의 자회사격이었다고 알려졌다. 최순실이 재단 일감을 이쪽으로 몰아줄 것을 요구했다는 전언도 있다. 대기업이 재단에 출연한 수백억의 돈을 자회사로 이동하려 했다며 ‘최순실 게이트’ 얘기까지 나오는 이유다.
한편 독일 현지에도 최 씨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회사가 있다고 밝혀졌다. ‘비덱(WIDEC)’이라는 스포츠 마케팅 업체, 그리고 한국에 있던 회사와 이름이 똑같은 ‘더블루케이(The Blue K)’라는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다. 올해 2월 설립된 더블루케이의 기업소개서에는 최 씨가 유일한 주주로 등재돼 있어 그가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더블루케이의 실소유주도 최 씨였다. 한국 더블루케이는 독일 더블루케이로 돈을 보내기 위한 ‘도구’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의혹 3 | 딸 정유라 승마 특혜
의혹은 그의 딸에게까지 미쳤다. 딸 정유라(정유연에서 개명) 씨의 승마 특혜 의혹은 이화여대 입학 전과 후로 나뉜다. 입학 전인 2013년 4월, 정유라는 경북 상주 승마대회에서 우승이 아닌 준우승을 했다. 이후 심판진은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러면서 최 씨가 승마협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실제로 대회 이후 관할기관인 문체부 과장과 국장이 교체됐다. 대통령이 직접 국장과 과장을 거론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교체를 지시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청와대 측은 당시 “여러 건이 복합적으로 문제가 돼 민정수석실의 내사가 있었으며 그 결과에 따른 정당한 교체”라고 입장을 밝혔다.
입학 당시 정황도 문제가 됐다. 정 씨는 2015학년도 이대 체육과학부 수시모집에 응시했다. 당시 전형은 2014년 9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됐다. 이대는 마침 그해 입시에 기존 11개의 체육특기 종목에 승마 등 12개를 추가해 총 23개의 특기전형을 진행했다. 추가된 12개 종목 중 승마에서는 정 씨만 뽑혔다. 정 씨를 위해 승마전형을 만들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유다.
이대 측은 “정 씨가 응시하기 최소 1년 4개월 전부터 교수회의에서 종목 확대를 논의했다”고 해명했다. 추가 종목에서 정 씨만 합격한 것에 대해 학교 측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2016학년도에는 다른 추가된 체육 종목에서 합격자가 1명 나왔다”고 했다.
수상 실적의 소급 적용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정 씨는 2014년 9월 20일 아시안게임 승마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고, 이 점이 합격에 상당히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 씨가 금메달을 딴 것은 수시 서류를 마감(9월 16일)하고 4일 뒤의 일이다. 당시 수상 감안 기준은 ‘원서 마감일 전 3년’이었다.
입학 후에도 정 씨의 편의를 봐준 여러 정황이 포착됐다. 정 씨는 올해 1학기에 ‘코칭론’을 수강신청 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훈련 중이어서 출석 대신 과제물 제출로 대체해 학점을 받았다. 그가 제출한 과제물이 공개됐는데, 오탈자와 비속어투성이였다. 대학생이 쓴 리포트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한데 과제를 이메일로 받은 담당 교수는 “수고하셨어요. 잘하셨어요. 감사합니다”라고 답장했다.
정 씨의 기말과제도 교수가 제시한 주제와 달랐다. 교수가 낸 주제는 (승마 자세의) 연속 사진 촬영 및 분석이었다. 그러나 정 씨가 낸 리포트에서는 3가지 기본 승마 자세만을 설명했다. 정 씨는 이 과목을 졸업 가능한 C+ 학점으로 이수했다.
특혜 논란이 일자 정 씨는 휴학계를 냈다. 이후에도 특혜 논란이 끊이지 않자, 최경희 이대 총장은 전격 사임했다. 최 총장은 “특혜는 없었다”고 했지만, 현재까지도 진상 규명을 위한 목소리가 높다. 정 씨는 이후 자취를 감췄다. 독일로 갔다는 말만 전해진다.
# 말보다 고양이?
의문의 ‘Yoora Chung’ 페이스북
“브뤼셀 출생, 오버우어젤 거주, 고양이 랙돌 분양”이라
스스로 밝혀
정유라 씨는 평소 SNS를 즐겨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굴이 처음 알려진 것도 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였다. 논란이 커지자 현재는 계정을 닫은 상태다. 지난 2014년에는 페이스북을 열심히 했다. 그때 남긴 막말이 다시금 주목받기도 했다. “개만도 못한 ×”, “똥× 빨아주는 건 니들 자윤데 나 끌어들이지 마라”, “사창가로 나가라”,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내용이었다. 현재 이 계정 또한 탈퇴한 상황이다. 당시 그의 이름은 정유연이었다. 정유라라는 이름은 올 초부터 쓰고 있다.
본인 계정에도 고양이 사진밖에 없다. 본인 소개란에 “랙돌(Ragdoll, 고양이 품종명) 브리더(Breeder; 사육사)”라고 기재해놨다. 랙돌은 고양이 품종 중에서도 명품으로 꼽힌다. 순수혈통의 경우 마리당 적게는 200만원에서 최대 1천만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있다. 영문으로 짤막한 자기소개도 남겨놨다.
“독일 오버우어젤에서 소규모로 랙돌을 사육하고 있다. 나는 랙돌을 사랑하고, 다른 동물들도 모두 사랑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유라는 말뿐만 아니라 10마리 정도의 개와 고양이를 키운다고 한다.
기자는 이 계정 사용자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새로운 이메일 계정을 만들고, 독일인 여성의 이름으로 페이스북에 다시 가입했다. 그리고 쪽지를 보냈다.
“랙돌에 관심이 많다….”
1주일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읽지도 않았다. 친구요청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그의 친구목록에 있는 200여 명 중 70명에게 친구요청을 보내봤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70명 모두가 친구수락을 했다. ‘애묘인’의 유대감에 놀랐다. 70명 중 현재 로그인 상태에 있는 이들 세 명에게 쪽지를 보내봤다. “Yoora chung을 어떻게 아느냐”고. 두 명은 답이 없었고, ‘Isabelle B***’라는 사람에게 답장이 왔다. 그는 “내 페북 계정은 고양이 브리더나 캐터리(사육장)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쓰고 있다. 내가 너와 친구를 맺었듯이 Yoora Chung과도 그렇게 친구가 된 사이지,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는 답이었다.
이 계정에는 특이점이 또 있다. 자신의 출생지를 ‘브뤼셀’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논란의 정유라가 어디 출생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스펠링 Yoora Chung은 국제승마연맹(FEI)에 등재된 정유라의 것과 똑같다. 정유라는 Jung Yura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될 수 있다. 정유연 때의 ‘유’는 Yu라고 표기했었다.
올해 1월부터 시작한 페북. 이화여대 스포츠학부 입학. 독일 오버우어젤 거주. 모든 동물을 사랑하는 Yoora Chung, 그리고 브뤼셀 출신. 동명이인인 걸까.
이화여대 체육과학부에 전화를 걸어봤다. 학부 개설 이래 정유라라는 동명이인이 있었는지 물었다. 전화를 받은 학교 측은 생각보다 쉽게 “동명이인은 없었다”고 답했다. 학부에는 매년 60명 정도의 학생이 다닌다.
해외 승마선수, “비타나V는 알아도 정유라는 모른다”
페이스북을 하던 중 한 페이지에서 정유라가 명마(名馬) 비타나V를 타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밑에는 두 명이 번갈아가면서 리플을 남겨놨다. 비타나V에 대한 얘기였다. Lily P***라는 사람과 Diego M***이라는 사람들이었다. Lily는 유럽의 승마 전문지 <유로드레사지(Eurodressage)>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다. 그에게 쪽지를 보내 ‘유라 정’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안다고 했다. 다시 물었다. 최근에 그를 본 적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그는 “개인적으로는 모른다. 드레사지 뉴스를 통해 이름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드레사지 뉴스나 업계에 따르면, 혹은 개인적으로 보기에 정유라는 어떤 선수인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는 “그녀가 어떤 선수인지 모른다. 다만, 모르간 바르반콘에게서 비타나V를 샀다는 사실은 안다. 모르간 바르반콘은 스페인 최고의 승마선수”라고 했다.
“비타나V는 알지만, 그녀(비타나V)의 라이더는 누군지 모른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비타나V가 승마선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Diego는 “비타나V는 내 롤모델인 모르간 바르반콘이 타던 말이다. 나는 비타나V를 사랑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