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6.04 03:00 | 수정 : 2016.06.04 03:08
[그 작품 그 도시] '백석 평전' ― 경성
그와 성북동 길상사에 자주 갔다. 그곳이 원래 대원각이라는 유명한 요정이 있던 곳이었고, 그것을 법정 스님에게 기부한 사람이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여사라는 걸 내게 처음 얘기해준 건 그였다. 백석의 시 한 편에 비하면 자기 재산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그녀는 진향이란 이름의 기생이었지만, 이후 백석이 지어준 자야라는 이름을 자주 썼다.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이 나왔을 때, 시집이 팔리는 속도에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의아한 느낌도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평안북도 정주의 사투리와 옛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은 백석의 시가 사람들 마음 깊이 가 닿기 쉽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백석의 시는 문학을 전공한 나도 무척 어렵게 느꼈던 기억이 났다. 백석의 시는 눈이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시각 중심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을 건드리는 그의 시어는 낭독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석은 경성의 모던 보이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백석 특유의 머리 스타일은 지금 봐도 여간 멋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는 남들이 20~30원 하는 양복을 사 입을 때,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연두색(!) 더블 버튼 양복을 입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조선일보사에서 일했던 백석이 러시아어 번역물을 소개하고(그는 외국어에 능통했다), '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 일을 했다는 건 꽤 유명한 일이다. 21세기에 그를 비추어보면 그는 '보그'나 '에스콰이어' 편집장을 하며 시를 썼을지도 모른다.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을 읽다가, 이전에는 잘 몰랐던 백석의 다양한 면모에 대해 알게 됐다. 가령 그의 다양한 결벽증 같은 것도 그랬다. 백석은 전화기를 손수건을 둘둘 말아 싸서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여닫을 때도 손잡이 쪽에 손을 대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 손이 닿지 않는 곳을 골라 손등이나 팔꿈치로 문을 여닫곤 했다. 그는 사람들과 악수한 뒤에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닦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당장 별명부터 지어주고, 아이처럼 여자 품에 묻혀 울다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는 남자였다.
백석은 경성에서 우연히 만난 통영 여자인 박경련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녀를 보러 통영에 자주 내려간 탓에 백석의 시에 유독 통영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박경련은 매번 백석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피하듯 사라진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백석은 좌절하고 마는데, 박경련은 그의 절친한 친구와 결혼해 버리는 것으로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박경련은 시인 백석에게 패배감과 함께 실연의 고통을 안겨준 여자였다.
예술가들에게 실패한 최초의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헤밍웨이는 스물한 살 때 애그니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와 헤어진다.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성향의 헤밍웨이는 애그니스의 거절을 배신이라 단정한다. 이후 헤밍웨이의 파괴적 여성 편력이 시작된다. 그는 배신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배신하는 것으로 늘 관계를 끝장냈다. 헤밍웨이는 이후 4번 결혼하는데, 흥미로운 건 결혼 중 불륜 상대와 모두 재혼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미래의 아내와 간통하는 것으로 늘 결혼의 마침표를 찍었고,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아내의 죽음을 아이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했다. '파파'라는 애칭을 가지기도 했던 그는 실은, 아내가 떠나기 전 그녀를 먼저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확인하는 남자였다.
백석의 연애사 역시 흥미롭다. 그는 자야와 연애했지만 부모님의 강요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자야 몰래 두 번이나 결혼했다. 그는 자야를 사랑했지만 때때로 박경련을 잊지 못해 마음 한편 그림자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못 말릴 정도의 낭만주의자여서, 함경도에서 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자야를 만나려고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그가 자야에게 준 시가 잘 알려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나는 평전 읽기를 좋아한다. 위대함 뒤에 오는 인간적 결함을 보는 일이 기이한 위로를 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티브 잡스 평전을 읽고 나면 그가 얼마나 자주 '인지 부조화'에 시달리고(거칠게 말해 내가 하면 '창조적 모방' 남이 하면 '표절'인 식이었다) 이기적이며, 이중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조종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훗날 사람들이 '현실 왜곡장'이라 부른 그의 성격적 결함이 잡스가 만든 제품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훼손하지는 못한다. 언뜻 못나 보이는 헤밍웨이나 백석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장 오래 남을 사랑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말을 한 건 나와 길상사를 걷던 그였다. 그 역시 이 말을 하다가 '삶의 아이러니'란 말을 꺼냈다. 그때 나는 그의 말을 단번에 오해했는데, 그 말이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이루지 말자, 라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약해진 사람이다. 자야는 결국 여러 번 결혼한 백석을 떠나고야 마는데, 내겐 '떠났다'는 사실보다 '고통스러웠지만 긴 시간 그의 곁에 머물렀다'는 말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었다.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이 나왔을 때, 시집이 팔리는 속도에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의아한 느낌도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평안북도 정주의 사투리와 옛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은 백석의 시가 사람들 마음 깊이 가 닿기 쉽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백석의 시는 문학을 전공한 나도 무척 어렵게 느꼈던 기억이 났다. 백석의 시는 눈이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시각 중심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을 건드리는 그의 시어는 낭독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석은 경성의 모던 보이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백석 특유의 머리 스타일은 지금 봐도 여간 멋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는 남들이 20~30원 하는 양복을 사 입을 때,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연두색(!) 더블 버튼 양복을 입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조선일보사에서 일했던 백석이 러시아어 번역물을 소개하고(그는 외국어에 능통했다), '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 일을 했다는 건 꽤 유명한 일이다. 21세기에 그를 비추어보면 그는 '보그'나 '에스콰이어' 편집장을 하며 시를 썼을지도 모른다.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을 읽다가, 이전에는 잘 몰랐던 백석의 다양한 면모에 대해 알게 됐다. 가령 그의 다양한 결벽증 같은 것도 그랬다. 백석은 전화기를 손수건을 둘둘 말아 싸서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여닫을 때도 손잡이 쪽에 손을 대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 손이 닿지 않는 곳을 골라 손등이나 팔꿈치로 문을 여닫곤 했다. 그는 사람들과 악수한 뒤에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닦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당장 별명부터 지어주고, 아이처럼 여자 품에 묻혀 울다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는 남자였다.
백석은 경성에서 우연히 만난 통영 여자인 박경련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녀를 보러 통영에 자주 내려간 탓에 백석의 시에 유독 통영을 배경으로 한 시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박경련은 매번 백석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피하듯 사라진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백석은 좌절하고 마는데, 박경련은 그의 절친한 친구와 결혼해 버리는 것으로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박경련은 시인 백석에게 패배감과 함께 실연의 고통을 안겨준 여자였다.
예술가들에게 실패한 최초의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헤밍웨이는 스물한 살 때 애그니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와 헤어진다.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성향의 헤밍웨이는 애그니스의 거절을 배신이라 단정한다. 이후 헤밍웨이의 파괴적 여성 편력이 시작된다. 그는 배신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배신하는 것으로 늘 관계를 끝장냈다. 헤밍웨이는 이후 4번 결혼하는데, 흥미로운 건 결혼 중 불륜 상대와 모두 재혼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미래의 아내와 간통하는 것으로 늘 결혼의 마침표를 찍었고,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아내의 죽음을 아이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했다. '파파'라는 애칭을 가지기도 했던 그는 실은, 아내가 떠나기 전 그녀를 먼저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확인하는 남자였다.
백석의 연애사 역시 흥미롭다. 그는 자야와 연애했지만 부모님의 강요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자야 몰래 두 번이나 결혼했다. 그는 자야를 사랑했지만 때때로 박경련을 잊지 못해 마음 한편 그림자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못 말릴 정도의 낭만주의자여서, 함경도에서 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자야를 만나려고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그가 자야에게 준 시가 잘 알려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나는 평전 읽기를 좋아한다. 위대함 뒤에 오는 인간적 결함을 보는 일이 기이한 위로를 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티브 잡스 평전을 읽고 나면 그가 얼마나 자주 '인지 부조화'에 시달리고(거칠게 말해 내가 하면 '창조적 모방' 남이 하면 '표절'인 식이었다) 이기적이며, 이중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조종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훗날 사람들이 '현실 왜곡장'이라 부른 그의 성격적 결함이 잡스가 만든 제품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훼손하지는 못한다. 언뜻 못나 보이는 헤밍웨이나 백석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장 오래 남을 사랑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말을 한 건 나와 길상사를 걷던 그였다. 그 역시 이 말을 하다가 '삶의 아이러니'란 말을 꺼냈다. 그때 나는 그의 말을 단번에 오해했는데, 그 말이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이루지 말자, 라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약해진 사람이다. 자야는 결국 여러 번 결혼한 백석을 떠나고야 마는데, 내겐 '떠났다'는 사실보다 '고통스러웠지만 긴 시간 그의 곁에 머물렀다'는 말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었다.
백석의 평전을 읽던 밤, 나는 백석이 자야에게 지어준 사랑 시를 읽었다. 내게도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어, 직접 쓴 글을 애인에게 읽어준다면 흰 밤의 산골처럼 먼 곳에서라도, 그 사랑이 이루어질 것 같은 밤이었다. 소리 내어 시를 읽으니 아득히 눈이 나려, 세상 모든 것들이 눈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풍경이 떠올라 미리 슬퍼졌다. 그것이 백석 시의 힘이었다.
가난한 내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평전―시인 안도현의 책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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