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亭子

처용가, 그리고 남의 아내를 탐한 남자들의 운명 / 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4

yellowday 2016. 5. 28. 16:25


등록일 : 2016-05-28 05:16   |  수정일 : 2016-05-28 06:42

국립국악원 ‘기로연’ 공연때 선보일 ‘처용무’. 사진=조선일보
  〈처용가(處容歌)〉의 노랫말은 이렇다.
 
  서울 달 밝은 밤에
  밤새도록 놀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겠는가.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조에 나오는 노래인데, 한자로 우리말의 음과 뜻을 따서 표기하는 향찰(鄕札)로 된 향가(鄕歌)이다 보니 미묘한 어감은 번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큰 줄기는 같다. 아무튼 그 문학시간에 종종 ‘가랑이가 넷이다’라는 노랫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난감해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고백하자면 나도 그런 친구들처럼 인상을 찡그리고는 했다.
 
 
  가랑이가 넷이라니?
 
  〈처용가〉를 부른 처용은 인간이 아니라 용왕의 아들, 그러니까 용(龍)이었다. 신라 헌강왕이 바닷가를 지날 때 갑자기 구름이 끼어 길을 잃었는데, 신하들의 말을 듣자니, 동해 용왕이 진노한 것이니 그를 달래는 제사를 지내라 하지 않는가. 헌강왕이 그러겠다고 하자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고 날이 맑아졌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용왕이 일곱 명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제 아들놈이 쓰실 만할 겁니다”라며 한 명을 남기고 갔다. 그가 바로 처용이었다.
 
  동해 용왕과의 일도 있고 또 그 핏줄이 나름 왕족이니 허투루 대할 수 없었던 헌강왕은 그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아주 예쁜 미녀를 붙여주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사달은 그 여자의 미모 때문에 일어났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역신(疫神)이 그녀를 탐내서 밤에 몰래 덮치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 처용이 그 유명한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더니 그냥 휙 돌아 나가 버린다. 이때 노랫소리를 들은 역신이 깜짝 놀라 뛰어나와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당신의 아내를 범했는데도 당신은 화를 내지 않으시니 정말 감동입니다. 이제부턴 당신의 얼굴 모습만 봐도 그 문 안으론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후 신라 사람들이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문마다 붙여 놓으며 사악한 것을 쫓아버렸다고 한다.
 
  처용을 둘러싼 이야기가 마뜩지 않았던 것은 용이 사람으로 변신한다거나 질병신인 역신이 사람으로 변해 여자와 성교를 벌인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또 처용이 제 아내가 딴 놈과 뒤엉켜 있는 것을 보고 “빼앗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라며 탄식한 것 때문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체념을 통한 극복’이 정말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처용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하게 센 놈에게 달려들 용기가 처용에게만 없는 게 아니니 말이다.
 
  아무튼 문학 시간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은 대체 이 줏대도 없는 역신 때문이었다. 온갖 질병을 몰고 오는 이 삭막한 신이 대체 그런 한심한 체념의 노래에 감동을 하다니…. 게다가 얼마나 찌질한지, 처용의 그림만 봐도 줄행랑을 놓겠다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등신 같은 질병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선생님은 처용이 문신(門神)이 되어 벽사진경(辟邪進慶)하는 풍속을 설명하는 것이란 말로 말끔하게 정리하셨다. 확실히 처용은 그의 이름처럼, ‘얼굴[容]을 문에 붙여 놓는다[處]’는 의미이고, 처용 풍속이 조선시대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온 것도 모르지 않고, 처용이 부른 노래와 춤이 ‘처용가’, ‘처용무’로 사악한 것을 쫓는 의미를 지니는 주술적인 것이란 것도 알고 있다. 역신과 동침했던 아내는 질병에 걸린 사람이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 질병을 물리치는 푸닥거리라는 설명도 배워서 잘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간통하는 아내와 간부를 보고 그냥 물러나는 비겁한 놈이 어떻게 재앙을 물리치는 ‘문신(門神)’이 된단 말인가? 못난이 역신과 쪼다 처용을 둘러싼 이야기에 숨어 있는 놀라운 매커니즘을 풋내기였던 내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처용의 위대한 관용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처용은 회피한 것도 도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관용을 베풀었던 것이다.
 
 
  소변보는 달구지꾼을 유혹한 여인
   
조선조 성종 때에 간행한 《악학궤범》에 등장하는 처용의 모습. 사진=한국콘텐츠진흥원
  옛이야기에도 분노한 남편이 아내와 간부를 징치(懲治)하는 이야기가 꽤 있다. 때로는 남편이 아닌, 남명(南溟) 조식(曺植)이나 동계(桐溪) 정온(鄭蘊) 같은 도학자들이 간통하는 남녀를 죽여 버리는 이야기도 있다. 《청야담수(靑野談藪)》라는 야담집에 실린 ‘음란한 여자를 죽이고 무고한 자를 살리다[殺一淫女 活一不辜]’는 조금 뜨악한 이야기인데, 서울 용산에서 소달구지 끄는 하층민 남자, 그러니까 용산 차부(車夫)의 이야기다.
 
  용산에 소달구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차부가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변이 마려워 인가 벽 뒤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나지 않는가. 쳐다보니 다락 창문에 한 여자가 몸을 반쯤 숨기고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보니 젊은 데다가 빼어나게 아름답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 밤이 늦었으니 유숙하고 가라지 않는가. 남편은 궁중에서 일하는 별감인데 마침 숙직으로 궁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한껏 달아오른 남자는 당장 달려들어 엉켜 돌아갔다. 한참을 이리저리 온갖 짓을 해 보며 밤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편이 돌아온 거였다. 놀란 여자는 남자를 다락에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남편을 맞았다.
 
  “숙직하다 말고 어떻게 오셨어요?”
 
  “잠시 졸다 꿈을 꾸었는데 집에 불이 나서 전부 잿더미가 되지 않겠어. 너무 걱정이 돼서 궁중 담을 넘어 왔어.”
 
  깜짝 놀랐지만 여자가 아무렇지 않은 듯 남편을 나무라며 돌려보내려 했지만, 젊은 부인의 몸이 그리운 남편은 어떻게든 한 번 해 보려고 치근댔다. 하지만 여자는 온갖 핑계를 대며 끝내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았다. 남편은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지만, 막무가내인 아내를 어쩌지 못했다. 결국 숙직하는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도 없어 그냥 돌아갔다.
 
  밖으로 나가 대문을 잠그고 돌아온 여자는 다락에 숨어 있던 차부를 내려오라 해 다시 한 판 들러붙어 질펀한 정사를 벌이는데, 이전보다 더 끈덕지고 집요했다.
 
  그렇게 한참 후, 먼저 나가떨어진 여자가 코를 골고 잠이 들었다. 차부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제 남편이 나보다 백배는 더 훌륭하고 잘생겼는데, 지나가는 나를 끌어들여다가 이렇게 음란한 일을 벌이다니…. 아까 그렇게 남편이 원하는데도 거부하다가 다시 또…. 아, 정말 추하고 더럽구나.’
 
  그러더니 일어나서 자고 있는 여자를 칼로 내리쳐 죽이고는 도주해 버렸다. 일은 다음 날 벌어졌다. 살인사건 용의자로 별감인 남편이 지목되었다. 밤중에 집에 다녀가는 것을 보았다는 옆집 사람의 증언이 있었다. 결국 남편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형수가 형장으로 갈 때는 보통 짐수레에 태워 데려가는데, 하필 그날 그 차부의 소달구지에 남편이 타게 되었다. 그날 밤에 다락 문틈으로 몰래 엿보았던 그 별감 나리가 사형수가 되어 자신의 달구지에 오르자, 비로소 남자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게 되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남자가 결국 관청에 가서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수를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재판관이 차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음란한 여자 하나를 죽이고 무고한 사람 한 명을 살렸으니, 너는 의인이로다.”
 
 
  차부가 의인?
 
  공연한 가정이지만, 궁에서 남편 별감이 왔을 때 여자가 그렇게도 원하는 남편과도 정사를 나눴다면 어떻게 됐을까? 노곤하고 흡족해진 남편이 돌아간 후 다락에서 내려온 그 차부가 그녀를 죽였을까?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신은 우연히 얻은 횡재(?)로 아름다운 여자와 벌인 성교만을 기억하며, 그리고 그 관직에 있는 남편에게 발각되지 않은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락에서 나온 후 그냥 가 버렸을 공산이 크다.
 
  남편을 그냥 돌려보낸 후에도 그녀에겐 죽지 않을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다. 다락에 숨겼던 차부를 내려오라 해서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다. 차부는 조마조마하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행이라며 잽싸게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할 만큼 했고, 또 남편이 들이닥치는 상황도 있었으니 들끓던 정욕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의 꿈이 ‘집이 불이 나서 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지 않은가. 하지만 여자는 오히려 더 불타 올라 차부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죽는 이유가 되었다. 식지 않는 정욕과 끝없는 탐닉, 그것이 그녀를 죽였다.
 
  용산 차부를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수를 한 것만 봐도 그는 파렴치한 작자는 아니다. 하지만 재판관의 말처럼 그를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왠지 주저된다. 재판관이야 무고한 남편에게 사형을 선고한 자신의 잘못된 판결을 호도하고, 자수한 남자에게 징벌을 내릴 경우 뒤따를 성난 민심을 고려하여, 면피용으로 그런 호칭을 붙여 주고 어물쩍 넘어간 것일 뿐이다.
 
  여인은 음란한 여자가 맞다. 차부가 누명을 쓴 남편을 위해 자수한 행위는 용기 있는 일인 것도 맞다. 그렇다고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줌발을 시원하게 쏘았을 그 처음부터 그녀를 ‘더럽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유혹하는 그녀가 음란하다고 생각했다면, 즉시 혼을 내든지 그때 징치했어야 옳다. 차부가 그녀를 음란하게 본 것은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제 볼일 다 보고 난 후였다.
 
  별감 남편이 오기 전에 정사를 벌인 것도 그렇지만 남편이 돌아간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와 얼러붙어 먹었다. 저도 흥분해서 덤벼들었다. 그랬던 그가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는 말처럼 그녀를 ‘더럽다’며 죽여 버리다니…. 좋다. 그래 그의 말처럼 그녀가 더럽다 치자. 그럼 그렇게 더러운 여자와 놀아난 자신은 뭐란 말인가? 자신은 깨끗하단 말인가? ‘데리고 놀아 보니 더러운 년일세’ 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녀를 죽인 것은 살인 이상으로 심각한 짓이다. 분명 그녀는 음란했다. 하지만 음란하다고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잘못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면 된다. 그 값이 그녀의 목숨은 절대 아니다. 더욱 그런 결정을 그녀와 같이 놀아난 작자가 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개성상인의 용기
 
망해사 법당 뒷면에 그려진 벽화. 신라 헌강왕과 처용의 조우 장면이다.

  그래도 용산 차부의 행동이 옳다고 여겨진다면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수록된 개성상인 이야기를 들어 보라.
 
  충청도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왔다가 낙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개성에 들렀다. 어느 날 소나기를 만나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긋고 있었는데, 날이 저무는데도 도무지 비가 그칠 줄 몰랐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그 집에서 여종이 나와 들어와 잠시 쉬라고 권했다. 주인이 있느냐고 묻자, 행상(行商) 나가 지금은 없고 부인만 있다고 했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랬지만, 날도 어두워지는 데다 상황이 궁색해져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집에는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친근하게 맞이하며 식사를 대접했다. 살가운 대접에 정담을 나누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동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결국 흉허물 없이 노닥거리다가 동침하게 되었다. 선비는 본래 유람하러 온 차인데,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니 몇날 며칠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붙어 지내게 되었다.
 
  이런 낌새를 이웃에 사는 상인의 친구가 알아차렸다. 행상 나가며 자기 집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그 친구는 상인의 행적을 수소문해 이런 소식을 전했다. 소식을 들은 주인 상인이 밤낮없이 달려왔다. 주인은 몰래 제 집 담을 넘어 들어가 창문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젊은 아내가 어떤 놈팡이와 붙어먹는 것이 아닌가. 격노한 상인은 벌컥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네놈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이냐!”
 
  사색이 된 선비는 그동안의 사연을 고백했고, 여인은 한쪽에서 벌벌 떨었다. 당장 죽여 버릴 듯 분노한 상인이 철퇴를 내리려던 조마조마한 찰나, 상인은 뜻밖의 행동을 했다. 여인에게 술상을 차려 오라고 하고는 허리에 찬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칼로 고기를 썩 베어 씹어 먹고는 그 칼끝으로 고깃덩이를 푹 찍어 선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먹어라.”
 
  그런 상황에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선비는 주인이 주는 대로 고기를 입으로 받아먹고 주는 술도 석 잔씩이나 거푸 들이켰다.
 
  “내가 이 칼로 네놈 목아지를 찔러야 하겠지만, 네놈 목숨이 불쌍해서 용서해 준다. 썩 꺼져라! 다시 보는 날에는 요절을 내 버리겠다.”
 
  죽다 살아난 선비는 부리나케 도망쳐 버렸다. 상인은 아내에게도 준엄하게 호통을 치며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하고는 집을 나갔다. 나가서는 자신에게 연락해 준 친구의 집으로 가 시치미를 뚝 떼고 소식을 전한 이유를 물었다. 친구는 외간남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놈이 아직도 있을까?”
 
  “아마 그럴거야.”
 
  상인은 친구와 함께 제 집으로 가서 온 집을 같이 뒤졌다. 선비가 줄행랑을 쳤으니 있을 리 없었다. 연락을 했던 친구만 공연히 볼썽사나운 꼴이 되고 말았다. 미안해하는 친구에게 상인은 괜찮다며 다독였다.
 
  “자네가 잘못 안 모양이군. 그래도 자네가 나를 깊이 생각해서 이렇게 연락을 주었으니 천하에 둘도 없는 친구일세. 고맙네.”
 
  상인의 극진한 말에 감동한 친구가 돌아갔고, 상인은 다음 날 다시 행상에 나섰다. 한편 혼쭐이 난 그 선비는 다음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다. 황해도 어느 고을의 군수로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그 개성상인이 감옥에 갇혀 죽게 된 것을 구해 주게 되고, 서로 그간의 사실을 알게 되자, 가깝게 지내며 잘 살았다고 한다.
 
  개성상인의 아내는 용산 차부에게 죽임을 당한 별감의 아내와 동일한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두 여인의 결과가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그녀들을 대하는 남성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용산 차부는 남편도 아니면서 멋대로 자신과 정을 통한 여인을 죽였다. 그런데 개성상인은 눈앞에서 못 볼 짓을 저지른 아내를 용서했다. 꼭 처용처럼 말이다.
 
 
  왜 아내를 얻는가
 
  개성상인의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누구를 용서했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아내인지 선비인지를 구분해야 그 용서의 핵심을 알 수 있다. 남자 위주의 세상인 데다가,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간통한 아내를 죽여 버리고 간부인 남자와 호탕하게 먹고 마시는 경우도 있으니, 개성상인이 용서한 것이 선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언제 봤다고 간부를 용서한단 말인가. 훗날 상인이 급제한 선비의 도움을 받는데, 그것을 두고 상인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난센스다.
 
  상인은 아내를 용서했다. 아내를 용서해야 했기에 선비를 죽일 수 없었을 뿐이다. 선비를 죽이면 소문이 날 테고, 그러면 아내의 불륜과 품행은 도저히 덮을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고 마는 거였다. 상인이 소식을 전한 친구에게 가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능청을 떨었던 것도 친구를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허물을 덮어 버리려는 행동이었다. 불륜은 나쁜 일이다. 상인도 그것을 모르지 않다.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는 이미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고 봉합하려 했다. 그것이 상인이 한 용서의 핵심이다.
 
  그가 아내를 버리거나 내칠 작정이었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징치했을 것이고, 그깟 선비쯤이야 한주먹에 해결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정당하며, 장쾌한 징치는 속 시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개성상인은 왜 아내를 용서했을까? 자신도 여기저기 다니며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니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합리적 사고로 아내의 욕망을 인정했던 걸까? 그게 아니면, 홀로 두고 멀리 장사를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아내의 성욕을 이해해서 받아들인 걸까? 이 아내를 죽이고 나면 다시 결혼할 테고 또 그 아내도 홀로 두고 돌아다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그냥 체념해서 눈감아 버린 것일까?
 
  어느 정도 조금씩 일리가 있다. 하지만 개성상인이 아내를 용서한 것은 본질을 똑바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왜 아내를 얻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아내를 얻는 이유는 식모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자식 생산 도구로 얻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그냥 아내일 뿐이다. 그는 아내의 불륜이 옳다고 해서 용인한 것이 아니다. 자신도 실수할 수 있으니 퉁 치자고 한 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그렇게 바람을 피운 아내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남편이 행상 나갔다고 모든 여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남편이 조금 부족하다고 모든 여인이 불륜을 꿈꾸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만약 개성상인의 아내가 다른 여인이었다면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려워도 정절을 지키고 더 강인하게 살아가는 여인도 많다. 분명한 사실은 그런 정숙한 여인이 지금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눈앞에서 잘못을 저지른 여인이 자신의 아내라는 점이다. 개성상인은 이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깨끗하지 못하다고 해서,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서, 아내가 아닌 것은 아니니 말이다. 개성상인의 용서는 힘없는 체념도, 도피적 망각도 아닌 진정한 용서, 관용이었다. 그는 진정 용기 있는 자였다.
 
 
  처용의 아내 사랑
 
  처용은 왜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밤새도록 도성 안을 헤집고 다녔을까? 혹자는 그가 무당이기에 굿을 하러 다녔다고 하고, 혹자는 그가 아내와 맞지 않아 배회했다고도 한다. 처용이 사실은 우리나라에 표착한 아라비아 상인으로, 말이 통하지 않아 부부 금실이 좋지 않았다고도 주장한다.
 
  글쎄, 뭐가 더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처용은 용왕의 아들이고, 그가 하는 일은 물을 다스리는 일이란 점이다. 아버지 용왕이 헌강왕에게 처용을 떼어 주며 “쓸 만하다”고 한 것은 화재를 감시하고 방범을 서는 일로 쓸 만하다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매일 밤 내내 도성 여기저기를 다니며 뭔가 중요한 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가 밤새도록 돌아다녔던 것은 부질없는 방황이나 아내를 버려 두기 위한 방임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던 거다. 행상으로 먹고사는 개성상인이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역신이 아내에게 침범한 것이다. 남을 도와주다 정작 제 집에 일이 난 거였다. 감기에 걸리면 물을 많이 먹으라고 현명한 의사들이 말하듯, 열병에 최대의 상극(相剋)은 물이다. 그리고 그 물의 우두머리가 바로 처용이었다. 비를 부르고 폭우를 내리기를 손가락 까딱거리는 것만으로 해낼 수 있는 신령스런 천하의 영물(靈物)인 처용은 넉넉히 역신을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용서했다. 그건 역신을 두려워해서도 아니고 역신이 불쌍해서도 아니다. 그의 용서는 바로 자신의 부인을 향한 용서였다. 그녀가 못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그렇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것이 처용 관용의 시작이고 끝이다.⊙  조닷

 

 

유광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박사 / 2007년 조선일보 주최 ‘제1회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 / 《진시황 프로젝트》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