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 원효가 지은 불교가요.
원효의 생존기간에 비추어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가사는 전하지 않으며,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원효불기(元曉不羈), 〈파한집 破閑集〉 권하 등의 문헌에 그 유래만 전한다.
① 〈삼국유사〉의 기록:원효가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후 속인 행세를 하며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자칭할 때,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바가지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이상했다.
원효는 〈화엄경 華嚴經〉의 "一切無人 一道出生死"(일체 구속됨이 없는 사람은 죽고 사는 것을 한길로 벗어남)의 문구를 따서 그 바가지의 이름을 '무애'(無
)라 했다.
이 바가지를 들고 이 노래를 부르며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불교를 널리 전했다. 그래서 몽매하고 가난한 많은 백성들이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니,
원효보다 큰 교화를 이룬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② 〈파한집〉의 기록:원효가 파계했을 때 표주박 모양의 이상한 그릇을 들고 저자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이를 '무애'라 했다.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호리병박에 금으로 만든 방울을 달고 채색비단을 장식해 두드리며 음절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경론(經論)에서 가려 뽑은 게송(偈頌)을 지어 부르니, 이것을 〈무애가〉라 했다.
밭가는 늙은이들까지도 이것을 본받아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효가 당시 귀족불교를 반대하고 민중들에게도 어려운 불교 경전을 쉽게 알리기 위한 의도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뒤 고려(일설에는 신라) 때는 ' 무애무'(無舞)라는 궁중무용으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에는 왕가의 번영을 송축하는 데 불리거나 무악(舞樂)으로 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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