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亭子

서울·베이징·도쿄의 '물 얻는 법', 그 속에 韓·中·日 미래가…

yellowday 2015. 11. 15. 06:09

입력 : 2015.11.14 03:00

[김두규 교수 國運風水]

필자의 통근길은 전북 순창에서 임실 옥정호를 지나 삼례를 오가는 길이다. 옥정호는 4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제공한다. 아침의 물안개, 봄날의 벚꽃, 가을의 구절초…. 호수 가득한 물만 바라보아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요즈음 옥정호는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 길을 오간 지 20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다. 가뭄 탓이다.

풍수는 바람과 물을 다루는 술(術)이다. 그 가운데 물을 더 높이 쳐 "풍수법은 물 얻은 것이 으뜸이다(風水之法 得水爲上)"라고 규정한다. 한 나라를 세운 지도자의 '물 얻는 법(득수법·得水法)'을 보면 그 국가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한·중·일 삼국의 수도 한양(서울)·베이징·에도(지금의 도쿄)의 초기 '득수법'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곽수경을 기리는 동상.
원나라 때 대도(大都·베이징)의 물 문제를 해결한 곽수경(郭守敬)을 기리는 동상. /김두규 교수 제공

 

 

 

2인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인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일본의 동쪽 변방으로 밀려 나갔을 때의 일이다(1590년). 에도에 터를 잡은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식수 확보였다. 샘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수도를 만들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지속적으로 상수도를 확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다마가와(玉川) 상수도인데 총거리가 43㎞이다.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도쿄의 상수 일부로 활용되고 있다. 에도가 19세기에 인구 100만이 넘는 세계 도시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의 베이징이 본격적 도읍지로 등장한 것은 우리 민족과 혈연관계가 있는 금나라 때의 일이다.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金函普)가 고려 출신임은 '금사(金史)'가 밝히고 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한 금나라는 베이징 서북쪽 옥천산(玉泉山) 물을 끌어들여 식수로 활용하였다. 원나라를 세운 뒤 이곳을 도읍지로 정한 세조 쿠빌라이가 가장 먼저 한 것이 식용수 문제 해결이었다. 그는 천문·지리·수리에 능한 곽수경(郭守敬)을 발탁하여 전권을 맡겼다. 곽수경은 기존의 옥천산 물만으로 새 수도의 물이 부족함을 보고 창평현의 신선천(神仙泉) 물을 끌어들이는 대규모 공사를 완성한다. 이를 통해 식수뿐만 아니라 조운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곽수경의 업적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아 베이징 스차하이(什刹海)에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조선 초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의 일이다. 일부 풍수 관리들이 한양의 물 부족을 근거로 도읍 불가론을 주장하였다. 유한우는 풍수서를 인용하여 "물 흐름이 길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끊긴다(流水不長 人必絶)"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하였지만, 태조와 태종은 새겨듣지 않는다. 심지어 파놓은 샘까지 메우게 할 정도였다. 1414년 태종이 양근(양평)을 지나다가 새로 지은 집 3채를 본다. 그런데 각 집마다 샘을 판 것을 보고 그곳 지방관을 파직시키고 하나의 우물만을 쓰게 한다. 지도자의 물 인심이 참으로 고약하였다. 조선의 운명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일본의 다마가와(玉川)와 중국의 옥천산(玉泉山) 및 신선천(神仙泉)의 물은 모두 최고로 좋은 물, 즉 상수(上水)였다. 건국자의 물에 대한 철학(득수법)은 그 나라 백성의 삶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끼쳤다. 물을 제대로 얻은 두 도시(베이징과 도쿄)는 제국의 수도 지위를 누렸지만 , 샘조차 함부로 못 파게 한 도시(한양)는 번국(蕃國)의 수도로 근근이 연명하였다.

좋은 물(上水)을 얻는 것은 날로 자연 파괴가 심해지는 지금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 하수(下水)인 4대강을 활용하는 것은 미봉책이다. 민족과 국가의 번영을 위하여 더 많은 상수원(上水源)을 확보하고 보전함이 중요하다. 상수원은 강이 아니라 산이다. 산이 물을 낳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