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로 내려가다가 언양 지나 통도사 IC에서 내려서서 통도사 톨게이트로 빠져나오면 바로 통도사다. 어마무시하게 큰 산문에는 영축산문(靈鷲山門) 현판이 달려있고 그 아래는 통도사 매표소. 표를 끊고 들어가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면 다시 또 하나의 커다란 문을 만나는데 영축총림(靈鷲叢林) 현판이 달린 총림문이다. 산문 하나 변변히 없는 절집들이 대부분인데 이곳 통도사에는 차타고 한 번, 걸어서 한 번, 두 번을 지나야 하니 대단한 절집이다.
그러고 나서야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라고 쓰인 일주문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천왕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통도사 하노전이다. 통도사는 워낙 절이 크고 당우와 문화재, 상징물이 많아서 상, 중, 하로 나누어 설명해야 이해가 쉽다. 지난 상편에서 하노전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중노전으로 들어설 차례인데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서면 중노전구역이다.
- ▲중노전 배치, 관음전과 용화전, 대광명전이 오른쪽으로 이어지며 석탑 옆으로는 세존비각, 개산조당, 해장보각이 이어진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중노전 마당에 튀어나온 듯 관음전이 발길에 걸리는데 그 오른쪽 뒤편으로 용화전과 대광명전이 이어져 있으나 눈앞에 잡힐 듯 바라보이는 대웅전에 빨리 갈 생각으로 조급하게 나아간다면 이 중노전의 불전은 못 볼지도 모른다. 앞으로만 갈 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숨은 듯 이어진 불전을 찬찬히 둘러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도 상노전 구역에 들어서기 전에 석탑의 오른쪽에 세존비각, 개산조당, 해장보각, 장경각으로 이어지는 부분도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곳이다. 흥미로운 건물이다.
- ▲불이문(不二門), 산사의 삼문(三門)중 일주문, 천왕문에 이은 마지막 문이 불이문이다. 중생과 佛이 둘이 아니며, 세속과 불가의 세계도 둘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들이 모두 하나니 이제 불국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중노전이 시작되는 문이며, 하노전보다 약간 높아지는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쪽 3칸은 모두 판문을 달았는데 평소 가운데 칸을 열어놓아 통행하게 하고 있으며, 좌우 측면은 벽체로 막혀있으나 뒷부분은 탁 트이게 개방하였다.
- ▲불이문(不二門) 편액은 송나라 미불의 글씨이며,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籃) 편액은 명태조 주원장 친필로 전해지는데 원래는 일주문에 걸려있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우리나라 불교의 근원이 되는 대사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안으로 들어서 천장을 보면 가운데는 대들보가 생략되었고, 호랑이와 코끼리가 머리를 내밀어 하중을 받치는 모습이 특이하다. 앞뒤 대들보 위에는 ㅅ(시옷)자 형태로 받침재를 올렸는데 덩굴무늬가 화려하며, 가만히 보니 일주문 내부 천장 서까래를 비롯하여 전후좌우 어디나 빈틈없이 채색과 그림이 화려하다. 코끼리와 호랑이가 받치는 종보 위에는 화반 그림이 아름답다.
불이문을 지나면 중노전 마당이 보이고 멀리 상노전 대웅전이 손에 닿을 듯하다. 오로지 부처님 진신사리를 뵐 마음에 조급하지 말고 중노전을 돌아보자. 마당 왼쪽이 원통방과 감로당, 오른쪽이 황화각과 판도방인데 모두 스님들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왼쪽 원통방에 또 하나의 흥선대원군 친필이 있다는데 일반 방문객이 보기는 쉽지 않다.
- ▲원통소(圓通所)편액, 흥선대원군 친필로 석파(石坡) 호가 쓰여 있다. 원통은 '이근원통(이근원통:청각에 집중, 깨닫는 수행)'에서 유래하였는데 대회시 대중을 수용하는 공간이며 그 옆에 공양간이 있는 구조이다.
중노전의 중심은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으로 이어지는 축인데 관음전이 다소 튀어나와 보인다.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영조 원년(1725)에 초창되었다고 하니 용화전, 대광명전보다 늦다.
앞에는 높이 약 3m의 석등이 하나 서있는데 일견 평범한 듯 보이나 중대석의 중간에 마디가 새겨진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화사창은 사각의 네 면 모두에 내었는데 창이 커서 시원해 보인다. 통상 8각에 네 면은 창을 내고 네 면은 벽으로 사천왕상 등을 새기는 형식에 비하여 특이하다. 사각의 화사석 위에 얹힌 옥개석과 보주는 평범하다. 관음전보다 오래된 석등이다.
- ▲관음전, 앞에는 석등이 하나 서 있다.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화려한 보관을 쓰고 기다란 연꽃을 든 모습이다.
관음전 뒤에는 용화전이 있다. 용화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공민왕 18(1369)년에 초창되었다고 하며 안에는 미륵불좌상을 봉안하였는데 미륵불은 석가모니 다음에 오실 미래불이다. 석가모니 이후 56억 7천만 년 후에 오실 분이다.
용화전 앞에는 탑도 아닌 특이한 석조물이 서 있는데 봉발탑이라고 한다. 즉,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미래에 오실 부처님인 미륵불에게 드리려고 가섭존자가 가사(袈裟)와 함께 갖고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데 통도사에서는 발우(鉢盂) 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이라고 한다. 보물 제471호.
- ▲용화전, 앞에 세워진 봉발탑은 여느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석조물이다.
다시 용화전 뒤에는 대광명전이다. 대광명전은 중노전의 중심건물인데 1756년 10월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8년 9월 중건하였다고 하며 내부 불상 뒤편의 삼신불탱은 보물 제1042호로 현존하는 삼신탱화 중 화격(畵格)이 최고로 알려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앞에 있는 관음전이나 용화전보다 크고 긴 모양이며 내부에는 법신불로 불리는 화엄경의 주불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 ▲대광명전, 광명의 빛을 두루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대광명전이라고 하는데 비로전이라고도 한다. 불상 뒷면의 삼신불탱은 왼쪽부터 석가모니후불탱, 비로자나후불탱, 노사나후불탱이며 원본은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이렇게 중노전의 주요 불전인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을 관심 깊게 보았다면 상노전의 대웅전으로 올라가기 전에 오층석탑이 하나 있고 그 오른쪽에 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다시 그 뒤로 절집에 어울리지 않는 솟을대문 형태의 삼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또 몇 개의 건물이 이어지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중노전 영역이다.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5층 석탑 옆, 솟을대문에서 약간 비켜선 자리, 상노전에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 담에 바짝 붙어있는 비각 하나, 안에는 시커먼 비석이 보이는데 바로 세존비각(世尊碑閣)이다. 숙종 32(1706)년에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즉,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이를 왜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두 개의 함에 나누어 담았다가 하나는 태백산 갈반사(現 정암사)에 봉안하고 하나는 다시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셨다는 일들이 전면(前面)에 적혀져 있다. 뒷면에는 석가모니의 행적과 각지의 시주내용을 적었다고 하는데 이로써 적멸보궁들의 사연을 일부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 ▲세존비각, 안에 세워진 비석은 밀양 표충비처럼 땀을 흘릴 때가 있다고도 한다.
-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圖碑)라는 비명이 쓰인 세존비.
세존비각 옆으로, 오층석탑의 오른쪽 정면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사대부 댁 사당에서나 볼법한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이 있으니 개산조당(開山祖堂)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안에는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 쓰인 아담한 전각이 있다. 해장보각은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이며 개산조당 현판이 달린 솟을삼문은 해장보각의 출입문인 셈이다.
- ▲해장보각의 출입문을 솟을삼문 형태로 세움은 조사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서일까? 절집에서 보기 드문 구성이다. 이 삼문에 개산조당 현판이 붙어있다 하여 이를 개산조당이라 부르면 안 될 듯하다. 개산조당은 해장보각을 일컫는 또 다른 별칭이며 이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삼문인데 둘러 쌓은 담이 없어 출입의 역할보다는 상징적 의미만 남았다.
해장보각 현판이 걸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아담하다. 해장보각이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 대장경(大藏經) 진리의 내용이 바닷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즉 용궁보각(龍宮寶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유사에 일러 자장율사가 진신사리와 금란가사, 그리고 불경 400상자를 갖고 왔다는데 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해장보각에는 자장율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그 좌, 우로 고려대장경 1,234권을 현대식 유리장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놓았다.
- ▲통도사의 개산조 자장율사 영정을 모신 해장보각, 솟을삼문에 붙은 개산조당 역시 해장보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장보각 뒤로는 통도사에서 전해오거나 외부에서 유입된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전) 등이 있다. 이렇게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 축과 개산조당, 해장보각, 장경각 축을 모두 둘러보면 이제 상로전으로 가게 된다.
상노전(上爐殿) 구역
- ▲상노전 배치, 제1 적멸보궁의 자존심 통도사의 대웅전과 금강계단이 있는 곳이다. 삼성각과 산신각, 대웅전이 맞닿은 좁은 공간에는 통도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구룡지(九龍池)가 있다.
상로전은 중노전이 불이문을 들어서면서부터인 것처럼 별도의 문은 없다. 바로 눈앞에 정(丁)자 형태의 대웅전이 보이는데 상노전이다.
ㅇ통도사 대웅전(국보 제290호)
대웅전은 상노전의 주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인데 지금 들어서면서 보이는 방향은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다. 즉, 대웅전은 금강 계단 쪽(북쪽)을 뒤쪽으로 하여 남쪽을 정면으로 하고, 들어가면서 보이는 측면은 동쪽이 된다. 그러나 들어오는 쪽이 측면이 되는 점을 고려하여 동, 서, 남쪽 어디나 모두 정면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심지어 북쪽을 포함 네 곳 모두에다 현판을 걸어놓았는데 들어오는 방향인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등 각기 다른 현판을 걸었다. 적멸보궁(구하 스님 글씨) 외에는 모두 흥선대원군 글씨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22(1644)년에 중건하였는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뒤편(북쪽) 금강계단을 향하여 길게 불단만을 설치하였으며 유리벽으로 대웅전 안에서도 금강계단이 보이도록 하였다. 원래 3칸x3칸 건물에 측면 2칸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 ▲대웅전, 왼쪽 노란색 '금강계단' 현판이 남쪽, 오른쪽 흰색 '대웅전'이 동쪽이다. 중노전에서 올라오면 대웅전 현판이 보인다. 丁자형 형태의 건물로 동, 서, 남쪽에 모두 ㅅ자 모양의 합각이 보이는 특이한 형태이다.
- ▲또한 대웅전 지붕 위에는 정상부에 청동제 보주가 있고 그 위에 다시 기다란 鐵柱를 세웠으니 찰간대(刹竿臺)라고 한다. 큰 절집(大刹)이거나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뿐만 아니라 막새기와 위에는 도자기 연봉을 설치하였으니 기와가 흘러내리지 않게 한다는 공학적 의미 외에도 부처님 보궁을 장식하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였음이다. 지붕에는 일부 철제기와도 있다고 하나 평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 대웅전은 그 모양의 특이함과 현판의 다양함 외에도 근본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위에서 설명한 丁자형 구조와 지붕에조차 찰간대를 설치하고 막새 위에 도자기 연봉이 있는 등의 뛰어남 외에도 건물이 올라선 기단부의 면석과 계단 소맷돌의 조각이 매우 화려한 꽃장식이다.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 바퀴 돌아보며 음미하는 까닭이다.
- ▲기단 면석에 큼직한 꽃송이와 계단 소맷돌에 활짝 핀 꽃과 넝쿨이 살아 있는 듯하다.
그밖에도 대웅전 문짝의 꽃창살이나 내부로 들어가서 볼 때 전면(북쪽)을 향한 대형 수미단의 규모와 정교한 아름다움, 비록 불상을 모시지는 않았지만 비어 있음에도 매우 권위적이고 경건하며 신성해 보이는 느낌은 유리 창문 너머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장과 사방을 둘러보면 시원하게 조성한 내부 공간과 높이 솟은 천장과 이를 지탱하는 기둥들, 내부에서도 노출되어 보이는 공포의 아름다움과 복잡해 보이지만 제각각 기능과 역할이 있는 부재들 모두에도 아름다운 채색과 무늬, 벽화들로 채워진 대웅전이다. 과연 국보로서 손색이 없는 통도사 대웅전이다.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묶어서 국보 제290호임)
- ▲대웅전 내부, 전면 유리벽이 금강계단이 보이게 배려한 것이다. 불상이 없는 긴 불단만 보인다. 너무 사람이 많고 복잡해서 대웅전 내부 구석구석을 찍기가 어려웠다.
대웅전 서쪽으로 돌아가면 좁은 마당 형태의 공간에 돌다리가 걸쳐진 작은 연못이 있다. 구룡지(九龍池)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아홉 마리 못된 용이 산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와 법력으로 모두 쫓아내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통도사를 수호하며 계속 있겠다고 하여 이를 허락한 후 연못을 다 메우지 않고 한 귀퉁이에 살게 한 곳이라고 한다.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 ▲구룡지, 작고 예쁜 정원 같다. 통도사 창건설화의 산증인이다. 왼쪽이 삼성각, 정면 계단 위 작은 전각이 산신각이다. 산신각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담장 안쪽이 금강계단이다.
자장 스님이 못된 용들을 쫓아내고 메꾼 자리가 지금의 금강계단 자리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당시부터 전래된 것인데,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장소에서 계를 받는다면 부처님으로부터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할 것이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가 놓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 부처님 진시사리를 참배하려는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반면에 이를 탈취하려거나 직위와 권력을 앞세워 친견한다는 명목으로 사리를 끄집어내는 경우도 있었던 듯하다. 진신사리의 수난이라 할 밖에. 삼국유사에 보면 고려 고종 22(1235)년에 왕명으로 이쪽 지방을 순회하던 상장군 일행이 석종을 들어내고 사리를 친견하다가 유리통 하나를 깨뜨려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으로 교환하였다고 하는데 기록에 나오는 첫 훼손사례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왜구 등 외부 침략군들이 진신사리를 약탈하려는 탓에 사리를 보호하려는 당시 승려들의 노력이 있었으며, 앞서 설명한 중노전에 있는 세존비에는 이런 과정이 적혀있으니 부처님 진신사리를 보관하고 유지하며 경배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일반인들의 직접 참배를 금지하였으나, 지금은 누구나 금강계단으로 들어가 가까이에서 참배하고 예경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다만 개방 시간과 제한사항이 있으니 확인함이 좋을 듯하다.
- ▲금강계단 전경,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경건함 때문인지 바라보는 중에도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든다. 널찍한 정방형에 외곽으로 두 겹의 석조 담장을 둘렀으며 그밖에는 커다란 석등을 하나씩 세워 불법을 밝히도록 하였다. 남쪽 정면에는 석문을 냈는데 모양과 무늬가 화려하다. 그 안에는 지대석을 깔고 이 층 기단을 높인 후 연화대좌를 받쳐 석종형 부도를 세웠다. 창건 이후 여러 번 중건이 있었다고 하니 처음 모습은 아닐 듯하나 엄숙 경건하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로 이해된다. 즉, 존재하는 금속 중 가장 단단하니 그만큼 완벽하고 불변하여 영원토록 지켜진다는 의미일 것인데 필자는 갑자기 석가모니 시대에 다이아몬드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역사상 다이아몬드가 처음 나온 것이 언제인지? 금은보화야 그때도 있었을 테지만…. 金中最剛(금중최강), 즉 강하고 안 변한다는 모든 철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뜻이지 다이아몬드를 말하는 건 아니라는 학자도 있었던 듯한데 어쨌거나 자장율사가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셔져서 년년세세 경배를 받고 계신다.
그밖에 대웅전 남쪽 면은 상노전 마당인데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은 응진전, 오른쪽은 명부전이며 맞은편은 일로향각(一爐香閣)인데 상노전을 관리하는 건물이다. 또한 응진전 뒤편 안쪽으로는 보광전이 있고 상노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발길을 돌려야 한다.
이렇듯 큰 법당과 주요 건물들 위주로 돌아보아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다. 과연 국지대찰 통도사답다. 아쉽기는 그밖에도 통도사에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도 많다고 하는데 대부분 주지실 등 스님들 공간의 실내에 있거나 성보박물관에 있어 일반 방문객들이 찾아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답사를 목적으로 가까이 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통도사 측에서는 본 답사기보다 더 상세하고 수준 높은 설명과 화상도 높은 사진을 첨부한 안내문을 비치하면 좋겠다. 통도사를 여러 번 간 필자 역시도 못 가본 구역이 제법 많다. 산 내 부속 암자까지 포함한다면 그야말로 대충 돌아본 답사기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렇게나마 적멸보궁 답사 연재 1편, 통도사 편을 마치고 2편 봉정암으로 가려 한다. 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