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人物

이승만 "한국땅 밟고 죽는게 소원" 歸國여비 모으려 5달러 이발비도 아껴

yellowday 2015. 7. 18. 06:37

력 : 2015.07.18 03:00

[이승만 서거 50주기] [1]下野 후 하와이에서 보낸 마지막 5년 2개월

옷 등 넣은 가방 4개만 들고 2~3주 쉴 생각에 하와이行
교민들이 생활비 보탰지만 독립운동 시절만큼 곤궁
정부 不許로 귀국 좌절되자 급격히 건강 나빠져 입원
병실 창문 밖 태평양 보며 "저쪽이 우리 韓人들 사는 곳"

이승만이 윌버트 최에게 이화장 소유권을 넘긴다는 위임장을 써준 때는 1962년 9월 11일. 하야 후 하와이에 온 지 2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하와이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1960년 5월 29일 서울을 떠날 때는 그저 2~3주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부인 프란체스카(1900~1992) 여사가 "쉬고 오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짐이라곤 옷가지가 든 트렁크 2개, 평소 쓰던 타자기와 약품 등을 넣은 가방 2개가 전부였다. 여러 차례 돌아가려 했지만 한국 정부가 귀국을 막았다.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생활비를 대주는 윌버트 최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1962년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모습. 프란체스카 여사가 죽는 날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꿈만 꾸던 남편의 곁을 지켰다. 

 

 

1962년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모습. 프란체스카 여사가 죽는 날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꿈만 꾸던 남편의 곁을 지켰다.
"아버지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승만 박사를 도왔습니다. 위임장 얘기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들은 적이 없어요." 윌버트 최의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목조 주택 앞에서 "이곳이 이 박사 내외가 살던 집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한두 번 온 적이 있다"며 회상에 젖었다. 호놀룰루공항에서 H1 도로를 타고 남동쪽 시내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다. 한적한 주택가 언덕에 있는 집은 한쪽에서 보면 단층, 다른 쪽에서 보면 2층 집이다.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조경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올 수 있도록 항공편도 마련했다. 1960년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밤이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이승만이었다. 하와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윌버트 최는 미국 민간 항공사 팬암(Pan Am) 하와이 지점장인 어니스트 올브라이트(Ernest Albright)에게 연락해 괌에 있는 CAT항공 DC-4 여객기를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등 교민들과 함께 비용을 마련했다.

이승만 내외는 당초 오아후섬 동북부 카할루 지역 미오미오 루프 47-259번지 윌버트 최의 바닷가 별장에 머물렀다. 16일 찾아간 집은 지금도 50여년 전 모습과 같았다. 정문에서 벨을 눌렀다. 한 미국인 남성이 문을 열었다. "플로리다에서 왔다"는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하고 며칠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객 상대 임대주택이 된 셈이다. 양해를 구하고 집에 들어서니 미국 방향 태평양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승만은 이 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외신은 "이승만 박사는 기자들의 방문을 사절하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전했다.

마키키 주택으로 옮긴 때는 여섯 달 후인 1960년 12월이었다. 바닷가 별장은 시내에서 너무 멀었다. 직접 자동차로 달려보니 약 40분 거리. H1과 리케리케 고속도로를 지나 병풍처럼 생긴 높은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다. 매주 시내에 있는 교회(한인기독교회)에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하와이 체류가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마당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집 부엌에서 10m쯤 떨어진 방까지 10차례 왕복운동을 하는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생전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하와이 교민 단체인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87) 회장은 "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과자 몇 개를 내주셨다. 모두 싼 것들이었다. 부부의 살림이 무척 곤궁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5달러 이발비도 아꼈다.

이승만은 늘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라며 눈시울을 붉힌 때도 있었다.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도 했다. 귀국 기회도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세." 전날 교민들과 작별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출발 당일 오전 9시 30분 정부 훈령을 받은 김세원 하와이 총영사가 마키키 집에 와서 귀국 불허 방침을 전했다. 이승만은 조용히 듣더니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해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이승만은 귀국이 좌절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날 저녁 트리플러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29일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으로 옮긴다. 마우나라니병원 측은 이승만을 무료로 모시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그때 모습 그대로 있다. 한국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이승만은 이곳 202호실에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한국 시각 오후 7시 35분)이었다. 병실에서 창밖을 보니 한국 방향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생전 바다를 가리키며 "저쪽이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韓人)들이 사는 데야"라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w조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