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은 강재수(姜在洙)의 딸이며 탄재(坦齋) 윤광연(尹光演, 1778~1838)의 부인이다. 그는 20세에 여섯 살 아래인 충주의 선비 윤광연과 결혼하였으나 두 집안이 모두 어려워 결혼 후 3년 뒤에 시집에 들어갔다. 정일당의 친가와 시가는 모두 높은 벼슬을 했던 명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 대에 와서는 단명하거나 벼슬에 나가지 못해 가세가 기울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곤궁하였다. 시아버지의 상을 치른 후 가계가 더욱 어려워지자 남편은 상복을 입은 채 호남과 영남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이에 정일당은 울면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행할 수 없다고 남편에게 학문을 권면하였으며 이후에는 남편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정일당은 시집오기 전 가정에서 약간의 한문교육을 받았으나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한 것은 30세가 다 되어서였다. 남편이 과거준비에 전념할 때 그는 남편 옆에서 바느질하며 남편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암송하며 시간 나는 대로 경전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과(始課)〉에는 학문에 대한 정일당의 진지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始課(시과)
三十始課讀(삼십시과독) 서른 살에 공부를 시작하니
於學迷西東(어학미서동) 학문의 동서를 분간하기 어렵네
及今須努力(급금수노력) 이제부터라도 모름지기 노력하면
庶期古人同(서기고인동) 거의 옛사람과 같아지리라
비교적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정일당은 견외지학(肩外之學)으로서의 학문을 넘어 학문의 방향을 똑바로 잡고 체계적으로 공부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학문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노력하면 옛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 확신하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학문의 목표를 성인에 둘 정도로 정일당의 뜻은 지대하였으며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그는 끊임없이 경학을 연구하고 심성을 수양하였다.
勉諸童(면제동)
汝須勤讀書(여수근독서) 너희들은 모름지기 부지런히 글을 읽어
毋失少壯時(무실소장시) 젊은 날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豈徒記誦已(기도기송이) 어찌 한갓 쓰고 외우기만 하랴
宜與聖賢期(의여성현기) 마땅히 성현이 되기를 기약해야지
남편 윤광연이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였으나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자 그는 재야학자로 학동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위 시는 이 무렵 정일당이 남편 문하에 드나드는 학동들의 학문을 권면하기 위해 지은 시로 보인다. 그는 학문을 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젊은 시절 부지런히 학문을 익히되, 쓰고 외우는 이론적인 것으로 끝내지 말고 꼭 실천하여 성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깨우쳐주고 있다. 실제로 그는 남편이 어느 정도 학문적 경지에 이르자 “배워서 쓰지 않으면 배우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무릇 성현의 가르침은 그 당연한 것을 알면 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며 학문의 실행을 권면하기도 하였다.
정일당은 학문과 수행의 기본 원리를 『중용(中庸)』에서 찾았으며 심성 수양에서도 성(誠)과 경(敬)의 실천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誠敬吟(성경음)
非誠曷有(비성갈유) 성이 없으면 어찌 살며
非敬曷存(비경갈존) 경이 없으면 어찌 존재하리
唯斯二者(유사이자) 오직 이 두 가지만이
入道之門(입도지문) 도로 들어가는 문일세
정일당은 오직 성(誠)과 경(敬)만이 도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주장하며, 학문의 성과나 업적보다 심성수양과 도덕적인 실천을 더 중시하였다. 이렇게 정일당은 남다른 집념으로 학덕을 쌓는 한편 늘 부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시부모와 남편에게 공경을 다했으며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데도 결코 소홀함이 없었다. 그래서 3일을 굶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제사를 받드는데 부족한 것이 없었고 손님을 접대하는데 즐거움을 다하여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행하였다.
한편 정일당은 남편의 학문을 위한 내조에 힘을 다하여 가난한 형편에서도 남편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행실에 과오가 없게 늘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남편은 부부지간에 마치 스승을 대하듯 엄숙했다고 하였으며, 정일당이 죽자 그는 하늘이 나의 좋은 벗을 빼앗아갔다고 한탄했다.
다음은 정일당이 종손자 근진(謹鎭)의 부인인 최씨와 권씨에게 준 시이다. 이 시에서 그는 정숙함과 순종을 부녀자의 법도로 내세우고 모름지기 이에 부지런히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示從孫謹鎭婦(시종손근진부)
貞慤首矣(정각수의) 정숙함을 으뜸으로 삼고
順從務焉(순종무언) 순종을 임무로 여기게
是婦道也(시부도야) 이것이 부녀자의 도리니
爾須勉旃(이수면전) 자네들은 모름지기 힘쓸지어다
한편 정일당은 남편을 대신하여 서(書), 제발(題跋), 묘지명, 행장, 제문(祭文) 등 많은 글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문안이나 문상, 회고나 추모, 족보간행문제로부터 심의(深衣), 상례(喪禮), 제례(祭禮) 문답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는 정일당이 당대 여성에게 주어진 학문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대부자작(代夫子作)을 통해 사대부들의 공적, 사회적인 학문 토론의 장에 직접 참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편에게 스승과 벗과의 학문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권했는데 이 역시 당대 여성에게 주어진 학문적 제약을 몸소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정일당이 남편에게 쓴 척독(尺牘)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는 밥을 짓지 못한지 사흘이 되었지만 남편에게 학문과 덕은 하루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은하자(銀河子) 이만영(李晩英) 선생이 와서 겨울을 난다고 하니 더불어 『주역(周易)』을 강마하되 “매일 토론한 것을 쪽지에 기록하여 보여주면 고맙겠다(願以明討論者 錄于片紙 下示則行甚甚)”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집념과 적극적인 자세로 학문에 임하였던 것이다.
〈증박중로(贈朴仲輅)〉는 남편을 대신하여 박중로에게 주는 시를 지은 것인데, 이 시에서도 그는 박중로에게 성정의 바름을 구하고 끊임없이 굳은 결심과 강한 집념으로 도를 연마하여 뜻을 이루라고 훈계하고 있다.
贈朴仲輅(증박중로)
志行雖貴勤(지행수귀근) 뜻과 행실이 비록 귀하고 부지런하다 해도
門路須尋正(문로수심정) 문로는 모름지기 바름을 찾아야하네
可久終成功(가구종성공) 오래하면 마침내 성취하리니
爲山與鑿井(위산여착정) 산을 만들고 우물을 파기를
이렇게 정일당 시의 주제는 철저한 유학적 이념의 기치 아래 대부분 학문에 대한 정진이나 심성과 품성의 함양을 권계하는 것이어서 다른 여성 문인들의 시와는 약간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정일당의 시에서는 다른 여성 문인의 시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여성적 정감의 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 3. 25., 국학자료원)
* 진짜 멋있는 남편은? 진짜 멋있는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외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사람일까? 마음이 푸근하고 자상한 사람일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까?
내가 보기에 진짜 멋있는 남편은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만났을 때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후기 강정일당의 남편 윤광연이었다.
그는 아내를 배려하고 존경하는 차원을 넘어 한평생 자신의 부인이자 스승으로 여기며 살았다.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년 - 1832년)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시인으로, 본관은 진주, 호는 정일당(靜一堂),
그녀는 1791년 윤광연과 결혼하여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으나 아홉 자녀 모두 돌을 맞기도 전에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운조 등의 필법을 이어받아 해서를 잘 썼으며 시문과 경서에 뛰어난 능력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저서로 《정일당유고 (靜一堂遺稿)》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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