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文史 展示室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번듯한 재산도 명예도 없지만 자랑스럽다, 참 열심히도 살았으니까"

yellowday 2015. 6. 12. 12:14

입력 : 2015.06.12 03:00

[17·끝] 일흔한 살 한행태의 행복한 인생

야간 중학교밖에 가본 적 없다, 죽을 각오로 월남으로 떠났다
가족은 내 인생의 목표였다, 숱한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가족들 학비 보낸 날 저녁이면 김치 한 점에 소주잔을 털어놓고선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야, 진짜 달콤하다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한행태는 열심히 살았다. 일흔한 살 되도록 열심히 살았다. 자기는 야간 중학교밖에 가본 적이 없지만 일곱 처남 다 키우고 동생 셋, 아이 셋 다 대학 보내고 아내도 대학교에 보냈다. 가족들 학비를 보낸 날 저녁이면 한행태는 단골 술집에서 강소주를 마셨다. 김치 한 점에 소주를 털어 넣고선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야, 진짜 달콤하다!" 한행태는 6·25전쟁과 지독한 가난과 월남전을 겪었고,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가는 대한민국과 자고 일어나면 솟아오르는 아파트 숲을 목격하고 IMF를 탈출해 발전하는 대한민국을 살았다. '대한국인(大韓國人) 한행태'가 말한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나 한행태는 1944년 8월 2일 부산 동구 수정동 산복도로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참을성 있고 마음이 넓으신 어머니 함자는 최차남이다. 현재 어머니는 93세이지만 놀랄 정도로 건강하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고생은 나에게 어머니를 위해 잘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주었다.


	1944년 8월 2일에 태어난 한행태는 대한민국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1944년 8월 2일에 태어난 한행태는 대한민국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이 땅을 살아온 평범한 사내요, 가족을 책임진 가장이다. 그가“열심히 살았다”고 말한다. /박종인 기자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무렵부터 정신 질환으로 매질과 폭언을 일삼으셨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어머닌 우리 6남매의 생활을 책임지느라 심한 고생을 하셨다. 뒷날 아버지의 병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내 동생이 해양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가족 사항을 조사하느라 보안대에서 찾아온 적이 있다. 그들은 아버지가 독립군을 돕다 일본에서 옥살이를 하셨다는 사실과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본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대필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과 인연을 맺었고 그들의 편지를 한두 차례 대필해주셨다가 일본인 순사에게 잡혀 들어갔다. 옥에서 받은 고문은 아버지를 병들게 했다. 내가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많이 울었다.

잊지 못할 손용필 선생님

1951년 나는 부산 초량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는 미군이 주둔 중이었다. 국민학교 6년 내내 나는 월사금을 내지 못했다. 반 친구 예닐곱 정도가 그랬다. 월사금을 내지 않은 아이들 명단을 들고서 담임선생님이 고민하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우리는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 전에 책보자기에 책을 싸서 교실 문을 나섰다. 누가 붙잡아주지나 않을까 기대하며 운동장을 한참 서성이다 힘없이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수업을 끝내고 동무들이 교문으로 쏟아질 때쯤 우리도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동생들뿐이었다. 아버지는 아팠고 어머니는 일하러 나갔다. 공부를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없었다.

6학년 때 담임이었던 손용필 선생님은 그런 내게 빛을 던져주신 분이다. 중학교 배정 날짜가 다가왔다. 넉넉한 집 친구들은 500원짜리 원서를 여러 장 사서 중학교에 지원했다. 난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응시 마지막 날 손 선생님은 아이들이 쓰다 버린 원서 몇 장을 휙 뿌리며 복도를 지나가셨다. 우리는 무엇을 던지는지도 모르고 종이를 잡아챘다. 나 또한 한 장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동아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문턱이라도 밟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손용필 선생님 덕분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했던가. 지금에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죽을 각오로 떠난 월남

야간 중학교 시절 이종사촌 형이 다니는 자동차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열다섯 살에 자동차 공장 보조를 시작했다. 그때 다짐했다. "나는 못 배웠어도 동생들은 끝까지 책임진다." 나는 동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서 우리 가족을 호강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눈앞에 보이는 논을 사는 대신에 머리를 사겠다고 다짐했다.


	1965년 9월 20일 포항에서 열린 청룡부대 창설식.
1965년 9월 20일 포항에서 열린 청룡부대 창설식. 한행태는 청룡부대원으로 월남으로 떠났다. /조선일보 DB
1960년 3월 중학교 졸업과 함께 부산역 앞 대일신차제작공업사에 들어갔다. 그 사이 어머니는 이불 공장에서 솜이불을 누벼주고 돈을 벌었다. 통조림 공장에서도 일했다. 항구에서 생선을 떼 와서 밀양·원동으로 돌아다니며 쌀과 바꿔오기도 했다. 그러다 1964년 8월 나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이듬해 월남 파병을 자원했다. 죽으면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나의 보훈연금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꼬박꼬박 나올 월급 35달러도 탐이 났다.

월남전에 차출된 아들을 둔 가족은 심한 불안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리라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탈영하는 이도 있었다.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셨다. 1965년 여름 포항 훈련소에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는 보자기에 바지 한 벌과 먹을 것을 싸 오셔서는 당신과 도망가자고 하셨다. 난 웃으며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위병소를 떠나는 어머니가 포항 시내를 헤매시며 내 걱정을 할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1965년 10월 3일 나는 청룡부대 부대원으로 수송선을 탔다. 월남에서 보초를 설 때면 나는 이면지에 글을 썼다. 야자수, 달밤, 포성, 전투…. 그런 단어들이 기억나는데 몇 뭉치나 되던 그 글들을 귀국할 때 버리고 온 게 후회스럽다. "자네 동생이 두 달이 넘도록 중학교를 가지 않는다네." 이웃 선배가 보낸 편지에 나는 무척 화가 났다. 나는 "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탈영해버리겠다"고 편지에 썼다. 얼마 후 어머니에게서 답장이 왔다. "네가 매달 보낸 달러는 막내 삼촌 장가 빚을 갚는 데 썼고, 나머지 돈으로 동생을 중학교에 보냈다"고 적혀 있었다.

다행히 나는 죽지 않고 귀국해 1967년 1월 병장으로 제대했다. 아홉 살 아래인 남동생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동생이 부럽기도 하다. 동생한테는 공부가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형이 있지 않았나. 동생은 지금 누가 봐도 번듯한 사회적 지위에 올랐다. 물론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가족은 인생 목표였다

내가 월남에 있는 동안 '불도저 시장' 김현옥은 부산을 개벽시켜 놓았다. 항구는 반듯해져 있었고, 전차는 사라지고 자동차가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제대 두 달 뒤 나는 부산 전포동에 있는 신진공업사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최초로 버스를 만든 회사였다. 1972년 나는 울산 현대자동차 판금부에 입사했다. 회사 정문 앞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입사 1년 전 나는 친척 주선으로 강원도 아가씨 백미자와 결혼했다. 아내에게는 동생이 일곱이나 있었다. 우리는 회사 근처에 살림집을 차렸다. 월세가 2500원이었다.

일곱 처남은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울산 우리 집으로 데려와 키웠다. 다락 하나 있는 두 칸짜리 집은 늘 가족이 바글바글했다. "매형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 얘기한다. 기술을 배우고 성실하게 살아라." 처남들에게 늘 했던 말이다. 착하고 성실한 처남들은 지금 모두 울산에서 행복하게 잘 산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한행태가 살아낸 1970년대는 자동차의 시대였다. /조선일보 DB
경부고속도로에 버스와 새마을차, 그레이하운드가 달렸다. 1974년에는 포니가 나왔다. 우리는 아침 8시에 칫솔 하나 들고 출근했다. 밤 10시 퇴근은 조퇴였고, 12시 퇴근은 정상이었다. 월급은 2만8000원이었다. 석 달에 한 번 보너스가 나왔다. 조퇴하면 동료들과 막걸리에 회를 아무리 먹어도 100원이 넘지 않았다. 나라에는 늘 시간이 부족했고, 가정이라는 너른 논에는 물이 넘치는 시절이었다. 그 사이에 큰딸 수정, 둘째 지희, 막내 경호가 태어났다. 내 인생 목표이자 사는 이유인 내 가족이었다.

1979년 현대자동차 새 공장이 완공되고 나는 퇴사했다.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는 더 이상 젊은 기술자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 나는 작업용품 납품상을 차렸다. 삼척에서 온 처남들은 모두 이 상점에서 일하다가 큰 직장을 얻어 나갔다. 아는 것 없는 처남들을 직원으로 채용했으니 경영이나 기술적인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6년 만인 1985년 가을 부품상은 소임을 다하고 문을 닫았다. 우리는 울산 집을 정리하고 서울 불광동으로 올라왔다. 외려 홀가분했다. 동생 셋을 대학 졸업시키고 처남들을 독립시키고 나니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생을 집중할 수 있었다. 나라가 안정되면서 그때 많은 시골 사람이 서울로 올라왔던 걸로 기억한다.

1987년 서울, 따뜻한 이웃들

마흔한 살짜리 가장에게 서울은 따뜻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 이웃 분이 자기네 양돈장 한편을 내줘 경기도 일산에 양돈장을 차렸다. 이듬해에는 양돈을 하면서 알게 된 중국 음식점 사장이 배려해 일산시장 식당 앞에 리어카를 놓고 열쇠 수리점을 차렸다. 비를 맞는 내 몰골을 보다 못한 그분이 담벼락 한쪽을 비워줬다. 거기에 벽돌을 쌓고 간이 상점을 만들어 열쇠도 만들고 크고 작은 공구도 팔았다. 서울 남대문시장에 가서 일주일 동안 열쇠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공구를 사러 청계천 공구 거리에 가니 울산 시절 거래했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선 "팔면 갚으라"며 물건을 공짜로 안겨줬다.

시장터에는 길을 잃고 우는 아이가 자주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하드를 사주고 노끈으로 허리를 묶어 가게에서 달래고 있으면 엄마들이 울고 불며 자식을 찾으러 오곤 했다. '뚱뚱이 아저씨 열쇠집'은 어느 틈에 시장통 여자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뚱뚱이에게 일감이 밀려들었다. 특히 문틀 고칠 사람을 찾아달라는 문의가 많았다. 1987년 수도권이 개발되던 시기였다.

그해 11월 나는 알루미늄 새시 제작사를 차렸다. 이듬해 2월 아파트 담장과 철물 공사를 따냈다. 서울 녹번동에 있는 아파트 방화문 공사도 따냈다. 88올림픽이 열렸다. 일감이 폭주했다.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벌고 저축도 할 수 있었다. 의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웃사촌 덕에 벌어진 기적이었다.

아내까지 대학 보내준 택시 운전

올림픽 이후 전국의 부동산이 들썩였다. 1989년 나는 경기도 파주 야산에 있는 땅을 사서 새시 공장을 차렸다. 실수였다. 외진 곳이라서 손님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이 딱 끊겨 있었다. 이웃들 덕에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내가 잘났다는 생각만 한 것이었다. 1992년 겨울 아이들이 대학교에 다닐 때였다. 또다시 빈곤이 찾아왔다. 변화와 발전을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 불광동 종점 부근에 서 있는 택시들을 보고 무작정 중화동에 있는 신라택시에 찾아갔다. 운전기사가 귀할 때라 금방 취직이 됐다.

처음 택시를 몰고 나간 날 나는 너무 서툴렀다. 상경한 지 꽤 지났지만 서울 지리에 밝지 못했다. 잊지 못한다. 서울역 앞 고가도로며 삼각지 로터리 고가도로에서 나갈 길을 잃고 모골이 송연했다. 수시로 손님에게 가족 생계를 핑계대며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좌절감과 열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걱정이 식구들에게 또 다른 걱정이 될까 그게 또 걱정이 돼서 집식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1997년 연말 몰아닥친 IMF 외환위기.
1997년 연말 몰아닥친 IMF 외환위기. 한행태는 택시를 몰며 가난한 대한민국을 목격했다. /조선일보 DB
하지만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루하루 번 돈을 모아 아이들 등록금을 부칠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행복했다. IMF 외환 위기도 운전석에서 넘겼다. 집도 사고 두 딸을 시집도 보냈다.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 아내는 아이들 교과서를 함께 공부하면서 가르쳐 아이들을 대학에 보냈다. 두 딸이 시집갈 무렵 아내는 중·고교 과정을 뒤늦게 마치고 2002년 대학교에 합격했다. 백미자, 내 아내는 2010년에 경기대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아이들도 모자라 아내가 공부하는 데 뒷바라지까지 했으니 이렇게 달콤한 일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

나는 지금 서울 구기동에 있는 오피스텔 경비실에서 일하고 있다. 2005년 내 가족을 살려준 운전대를 놓고 이듬해 나는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어머니는 장수하시고, 동생들은 행복하게 함께 늙어가고, 처남들 또한 행복하고 아들딸은 다 잘 컸다. 내 머리는 아내가 늘 깎아준다. 호기 있게 살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했다. 대신 가족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은 평생 지켰다.

광복 한 해 전에 태어났으니 나는 대한민국과 함께 세월을 살아왔다. 내가 가난을 탈출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위대한 나라가 되었다. 번듯한 재산도, 명예도 없지만 자랑스럽다. 경비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가끔 중얼거려 본다. 한행태, 너 참 열심히도 살았구나!


[연재를 끝내며… 우리들의 영웅, 大韓國人]


	하나하나의 대한국인이 모여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사진은 전북 고창 학원농원에 가득 핀 해바라기.
하나하나의 대한국인이 모여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사진은 전북 고창 학원농원에 가득 핀 해바라기. /박종인 기자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 붙어 있던 작은 신생국이 70년 세월 속에 대국(大國)이 되었다. 식민지와 전쟁과 가난을 딛고 일어났다. 그 국민은 광부로, 선원으로, 군인으로, 노동자로 해외에 나가 피와 땀을 흘렸다. 청계천변 판자촌과 태백 지하 1000m 막장과 구로공단에서 기적이 탄생했다. 누군가는 안락함 대신 험로(險路)를 택해 조국으로 돌아와 평생을 바치기도 했다. 괄시와 천대 속에 웃음을 준 광대도 있었고, 시민들의 발이 되어준 안내양 누나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의 눈물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다.

고희를 넘긴 그 나라가 지금 무척 힘들다. 역병(疫病)과 가뭄이 온 나라를 휩쓸고 곳곳에서 탐관오리가 발호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이 나라를 만들고 지키고 살아내는 백성, 대한국인이 아닌가. 지난 70년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대한국인이 또 이 나라를 만수무강하는 날까지 이끌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모든 대한국인에게 박수를!  조닷